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에 무반(武班) 두 사람이 운검을 차고 왕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2품 이상의 임시 관직을 말한다. 나라에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왕이 참석할 때 유능한 무장(武將)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였다. 정식 명칭은 별운검(別雲劍)이나 운검으로 부르기도 한다.
[담당 직무]
별운검은 입직(入直)과 시위(侍衛)할 때에 왕의 좌우에 서서 국왕의 보검을 상징하는 운검을 항상 착용하는 것을 정해진 법식으로 삼았다[『세종실록』 14년 10월 29일].
이들이 사용하는 칼은, 칼집은 물고기 가죽으로 싸고, 칠은 주홍색을 사용하고,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며, 붉은 술[紅絛穗兒]을 드리우고, 띠는 말위라는 가죽을 사용하였다[『세종실록』 오례 군례 서례 병기 창·장검·검].
1456년(세조 2)에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이 되어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를 별운검으로 선정하여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을 영접하는 창덕궁(昌德宮)의 연회장(宴會場)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상왕(上王)인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세조의 모신(謀臣)인 한명회(韓明澮)가 비밀히 탐지하고서 세조에게 아뢰어 연회 당일에 운검을 폐지시킴으로써 결국 이 거사가 중지되고, 뒤따라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사육신이 모두 고문 처형된 사건이 있었다[『세조실록』 2년 6월 2일].
[변천]
별운검은 무반 가운데서만 선발하지는 않았는데, 이것은 문반 출신인 한명회도 별운검을 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세조실록』 6년 1월 16일].
정조대에는 그간 별운검을 뽑는 기준이 문란해져 왕의 시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임명에 자격 제한을 두어 육조의 장관이나 정부의 서반(西班) 및 참판 가운데 일찍이 아전(亞銓)을 지냈던 사람을 뽑아서 추천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20년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