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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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별영(南別營)

서지사항
항목명남별영(南別營)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신영(新營)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 한성의 남부 낙선방 묵동에 있었던 금위영 별영의 하나.

[개설]
1683년(숙종 9)에 금위영을 창설한 이후 금위영의 규모가 커지고 궁궐 숙위 이외에도 숙종대 후반에 훈련도감과 함께 도성 방어의 주요 군영이 되면서 별도의 군영 시설 및 주둔지가 필요해졌다. 이에 1730년(영조 6) 남산 아래인 남부 낙선방(樂善坊) 묵동(墨洞) 일대에 남별영을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키고 그 주변에 각종 군창 및 화약고 등을 두었다. 남별영은 금위영의 주요 시설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83년(숙종 9)에 금위영을 창설한 이후 창덕궁의 서문인 금호문(金虎門) 밖 중부 적선방(積善坊)에 있던 정초청(精抄廳)에 본영을 두었다. 여기에 표하군(標下軍), 향군(鄕軍), 기사(騎士) 등이 입직하며 궁궐 숙위 등을 담당하였다. 이후 금위영이 도성 방어의 주요 군영이 되면서 그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별도의 군영이 필요해졌다. 이에 금위영에는 여러 별영(別營)이 창설되었다. 우선 창덕궁 일대의 숙위를 위한 별영이 창설되었는데, 창덕궁의 서문인 경추문에 둔 서영(西營)이나 개양문 가에 있던 남영(南營)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도성 방위를 위해 지방의 향군(鄕軍) 600여 명이 한성에 올라와 주둔[番上]하였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군기, 군량 등을 보관할 별도의 군영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영조대 이전에는 금위영의 사습(私習)을 항상 남벌원(南伐院)에서 하였는데 바람과 비를 피할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지방에서 번상하는 향군들이 왕래하며 젖는 폐단이 많았다. 또한 임시로 친 군막(軍幕) 등의 기구들이 자꾸 해지거나 파열되어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이에 1730년(영조 6)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비용을 내어 남부 낙선방 묵동에 남별영을 건설하였다.

[조직 및 역할]
남별영은 공해(公廨)의 규모가 139칸으로 남별영의 남쪽에는 남창(南倉) 101칸, 북쪽에는 하남창(下南倉) 104칸이 있었다. 남창의 서쪽 건너 산기슭에는 화약고 17칸이 있는 등 남별영 일대는 금위영의 주요한 분영인 동시에 각종 창고가 있는 지역이었다. 남별영은 평소 초관(哨官) 1원, 별기위(別騎衛) 2인이 향군 15명을 인솔하여 입직하였다.

남별영에서는 지방에서 번상하는 5초(哨) 규모의 향군을 모아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는[看審]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고, 금위영 군사들의 조총 훈련과 사습 등 군사 훈련을 행하기도 하였다. 남별영은 종묘(宗廟)와 가까워 이곳에서 행하던 금위영 군병의 군사 훈련을 종종 남별영으로 옮겨 시행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10년 12월 23일]. 남별영에서는 금위영 별시사(別試射)의 과장(科場)을 설치하여 금위영 군사들의 시험을 치렀다. 특히 금위영의 관무재(觀武才)를 1686년(숙종 12)에 남별영 자리에서 치렀는데, 이것이 금위영 관무재의 시초였고, 이후 1723년(경종 3), 1778년(정조 2)에도 관무재를 시행하였다.

[변천]
1884년(고종 21) 11월에 어영청이 금위영과 합쳐져 친군별영(親軍別營)이 되면서 남별영은 그 소속 분영이 되었으며, 이전에 비해서는 군사적인 중요성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1886년(고종 23) 2월 초에 해방경아문(海防京衙門)을 남별영으로 옮겨 설치함으로써[『고종실록』 23년 2월 4일] 남별영의 친군별영으로서의 성격은 상당히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1894년(고종 31)에 친군 제도를 혁파하고 이듬해 친위대(親衛隊) 등 신식 군대를 창설하면서 남별영은 완전히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차문섭, 「금위영 연구」,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집필자] 노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