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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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부(密符)

서지사항
항목명밀부(密符)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병부(兵符)
분야정치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이 관찰사, 절도사, 유수, 방어사 등에게 내려주어 전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동원하는 데 쓰던 병부(兵符).

[개설]
밀부(密符)는 조선시대에 변란이 있을 경우 군병을 동원하기 위해 절도사와 관찰사, 수어사, 총융사, 방어사 등에게 지급한 병부의 하나이다. 모양은 둥글고 한 면에는 몇 번째 부라고 쓰고, 다른 한 면에는 왕의 수결이 있었다. 가운데를 나누어 오른쪽 한 조각은 관찰사 등에게 나누어 주고, 왼쪽 조각은 대궐 안에서 보관하다가 변란이 있는 등 병력 동원이 필요한 경우 선전관(宣傳官) 등이 가지고 내려가 관찰사 등이 가진 조각과 맞추어보고 부합하면 병력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기부터 절도사나 관찰사 등이 휘하의 군사를 징발하기 위해 병부, 호부(虎符), 밀부 등을 사용하였는데 그 용도는 조금씩 달랐다. 호부는 발병호부(發兵虎符)라고도 하였는데 도절제사와 관찰사를 통해 도내의 군사를 징발하기 위해 1403년(태종 3)에 체제를 처음 마련하였다가 1462년(세조 8)에 폐지하였다. 병부는 1451년(문종 1)에 진법(陣法)을 크게 개편하면서 나타났는데 감사와 병사, 수사에게 주어진 것을 모두 발병부(發兵符)라고 하였다. 도내 군사를 징발할 경우 육군에 사용하는 발병부와 수군에 사용하는 수군부(水軍符)로 구분하였다.

병사와 수사, 그리고 감사의 교대에 따른 호부와 병부를 주고받는 절차는 매우 엄격하였다. 1411년(태종 11) 11월의 절차에 따르면, 호부는 신임 감사와 병사, 수사가 반드시 의정부에서 왕명을 받아 공문을 보낸 뒤에 호부를 전달받고 그 자호(字號)와 전달받은 곳, 날짜를 모두 갖추어 보고하도록 하였다. 병부도 호부와 같은 주고받는 절차에 따라 시행하였다. 각 고을의 수령, 각 진과 포의 첨절제사와 만호 등도 병부를 전달받은 뒤 병사, 수사나 감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하여야 하였다.

밀부의 존재와 그 발급에 대해서는 1460년(세조 6) 1월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세조가 황해도관찰사에게 친히 서압(署押)한 제24 밀부를 내려준 것이 그것이다[『세조실록』 6년 1월 7일]. 밀부가 제작된 것은 호부가 폐지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정변 등으로 왕권을 위협하는 사태가 일어나면 병사 등을 통해 지방군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왕이 바뀌면 밀부를 다시 제조하여 새로 발급하도록 한 것은 밀부의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다[『성종실록』 1년 1월 9일]. 밀부는 처음에는 병사, 수사 및 관찰사에게 지급하다가 예종대에 들어 관찰사는 군사를 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찰사에게는 지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관찰사가 군사를 담당하지 않지만 변란이 있을 경우 관찰사가 밀부가 없어 군사를 동원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다시 밀부를 지급하도록 하였다[『예종실록』 1년 9월 1일]. 군사 동원 이외에 왕이 거둥할 때 군령을 표신(標信)으로 내리기도 하지만 밀부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중종실록』 23년 9월 19일].

밀부는 조선후기에도 계속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발급 대상이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총융사 등 주요 군영의 장수와[『인조실록』 27년 2월 22일] 지방 요충의 지휘관인 방어사(防禦使) 등에게도 지급하였다[『인조실록』 16년 5월 3일]. 이후에도 밀부 발급 대상자가 늘어 시임 삼공(三公)에게도 밀부를 휴대하도록 하였고[『현종개수실록』 1년 3월 13일], 진무사(鎭撫使)를 겸하는 강화유수에게도 발급하였다[『숙종실록』 4년 10월 17일].

[형태]
밀부의 모양은 둥글고 한 면에는 일련번호에 따라 ‘제□부(第□符)’라 쓰고 다른 한 면에는 왕이 직접 수결하거나 친서(親署)하였다. 이것을 반으로 나누어서 오른쪽의 한 면인 우부(右符)는 관찰사와 절도사 등 발급 대상자에게 주고, 반대쪽 좌부(左符)는 대궐 안에 보관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변란이 생겨 지방의 군사를 동원할 때는 왕의 명령에 따라 선전관 등이 대궐 안에 보관하던 왼쪽 조각과 왕의 명령서인 유서(諭書)를 가지고 가서 관찰사, 절도사 등이 가진 오른쪽 조각과 맞추어보고 완전히 부합하면 왕의 명령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오종록, 「조선초기의 병마절도사」 상·하, 『진단학보』 59·60 , 1985.
■ 윤훈표, 「조선초기 발병부제의 실시」, 『학림』 31 , 2010.

■ [집필자] 노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