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무거(武擧)

서지사항
항목명무거(武擧)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시취(試取)
동의어무과(武科)
관련어천과(千科), 만과(萬科)
분야정치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무과의 또 다른 명칭.

[개설]
무거(武擧)는 당나라 측천무후대인 702년(장안 2)에 처음으로 무관을 선발한 제도의 명칭이었다. 고려시대에도 1109년(예종 4)부터 1133년(인종 11)까지 24년간 무과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문관들의 반발로 없어졌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무과를 설치할 것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결국 무거는 조선 1402년(태종 2년)에 들어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내용]
조선시대 과거에서 가장 큰 특징은 무과를 시행한 것이었다. 1402년(태종 2)에 처음으로 무과를 시행한 이후 문과와 함께 조선 양반 관료 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무과는 기본적으로 고위 무관을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다만, 기존 관리나 군사들이 무과에 합격할 경우에는 승진이나 관직 임용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무과는 문과와 함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3년마다 시행하는 정기 시험은 식년시라 하며 갑과 3명, 을시행과 5명, 병과 20명 총 28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 정원은 문과의 식년시 33명보다 적은 수로서 불교의 ‘33천 28수’에서 비롯하였다.

무과의 과목은 성종대 편찬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전(木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騎槍)·격구(擊毬)·병서(兵書)의 8기(技)를 보았다. 그 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전을 위한 과목을 추가하거나 변경하였다. 그 결과 조선후기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에는 목전·철전·편전·기추(騎芻)·관혁(貫革)·기창·격구·유엽전(柳葉錢)·조총(鳥銃)·편추(鞭芻)·병서의 11기로 늘어났다. 둥근 표적을 맞히는 기사는 사람 모양의 허수아비를 맞히는 기추로 바뀌었으며, 관혁·유엽전·조총·편추 등의 과목은 새로이 추가된 것이었다. 다만, 영조대 격구가 폐지되어 사실상은 10과목이었다. 이들 고시 과목은 식년시·별시·알성시·춘당대시 등 시험 종류에 따라 구분되었고, 초시·복시·전시의 시험 절차에 따라 나뉘어 선택되었다.

무과 급제자는 문과의 예에 따라 관직을 주되 2가지로 구분하였다. 우선 관직이 없는 자의 경우에 갑과 1등인 장원은 종6품직, 갑과 2등과 3등은 종7품직을 주고, 을과 5명은 종8품계, 병과 20명은 종9품계를 주었다. 무과 장원은 동반직(東班職)에 곧바로 제수하였고, 그 나머지는 별시위에 소속시키거나 훈련원의 권지에 임명하였다. 다음으로 원래 관직이 있는 자의 경우에 갑과 1등은 4품계, 갑과 2등과 3등은 3품계를 주고, 을과는 2품계, 병과는 1품계를 올려 승진시켰다.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무과 급제자의 수가 많아지면서 관직의 수는 부족해졌고, 조선후기로 갈수록 무과 출신의 관직 진출은 어려워졌다. 특히 한꺼번에 수천 명을 뽑는 만과(萬科)가 자주 실시되면서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아예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무과 출신이 크게 늘어났다. 이는 무과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리는 배경이 되었다.

무과는 식년시 외에도 국가의 크고 작은 경사에 실시한 비정기 시험으로 증광시·별시·알성시·정시·외방별시·춘당대시·관무재 등 다양한 명칭으로 시행되었다. 증광시는 왕의 즉위를 비롯한 국가의 크고 작은 경사에 시행되었는데, 조선후기에는 나라의 경사가 여러 가지 겹쳐 대증광시가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원칙적으로 시험 절차와 합격 인원은 식년시와 동일하였다.

비정기 시험은 시험 시기와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아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보통 몇 백 명, 심한 경우에는 몇 천 명에 달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의 정시에서 3,200명, 1620년의 정시에서 5,000명, 1637년(인조 15)의 별시에서 5,500명의 급제자를 뽑았다. 1676년(숙종 2)의 정시에서는 18,000여 명을 뽑아 이른바 만과라는 명칭을 얻었다.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의 총 인원은 약 150,000명에 달하였다. 이는 15,000여 명에 이르는 문과의 10배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무과는 중앙집권적인 관료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양반 자제들에게는 관직 진출은 물론 가문을 유지하는 배경이 되었고, 하층민에게는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통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과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근대식 관리 선발제를 도입하면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송준호, 「이조후기의 무과운영의 실태에 관하여-정다산의 오난설을 중심으로-」, 『전북사학』 1, 1977.
■ 심승구, 「16세기 무과의 운영과 추이」, 『조선시대 정치와 사회』, 2002년 12월.
■ 심승구, 「임진왜란 무과급제자의 신분과 특성」, 『한국사연구』 92집, 1996.
■ 심승구, 「임진왜란 중 무과의 운영실태와 기능」, 『조선시대사학회』 1집, 1997.
■ 심승구, 「조선 선조대 무과급제자의 신분」, 『역사학보』 144집, 1994.
■ 심승구, 「조선초기 무과제도」, 『북악사론』 1, 1989.
■ 윤훈표, 「조선초기 무과제도연구」, 『학림』 9, 1987.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집필자] 심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