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에 무과를 시행하면서 무과 합격자의 명부인 무과방목(武科榜目)을 만들었다. 무과방목은 보통 문과방목과 함께 만들었는데, 전자를 호방(虎榜), 후자를 용방(龍榜)이라고 불렀다.
[연원 및 변천]
무과방목은 1402년(태종 2)에 무과를 처음 실시하면서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과방목은 보통 문과방목과 함께 만들었는데, 1894년 무과를 폐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형태]
무과방목은 무과 시험인 초시, 복시, 전시 3단계의 절차에 따라 만들었다. 이를 초시방목, 복시방목, 전시방목이라고 한다. 보통 무과방목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전시방목을 뜻한다.
첫째, 초시방목은 무과 초시의 합격자 명단으로, 현재 5종 정도 전해진다. 다만, 초시방목은 『평안도청남평양도회경과정시초시입격인방목성책(平安道淸南平壤都會慶科庭試初試入格人榜目成冊)』의 사례처럼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방목의 명칭을 ‘방목성책’이라고 썼다. 이는 각 지방의 여러 지역에서 뽑은 합격자의 명단인 방목을 하나로 묶어 생긴 명칭이다. 다음으로 1차 합격자 명단인 만큼 ‘급제(及第)’가 아닌 ‘입격(入格)’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방목 안에 각 합격자의 시험 성적을 수록하였고, 방목 안에 사조(四祖) 즉,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를 기록해놓았다.
둘째, 복시방목은 아직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다. 다만, 『일성록』에 무과 복시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에서 방목을 올렸다는 기록을 통해, 초시 합격자들을 모아 서울에서 복시를 시험 본 뒤 합격자 명단을 복시방목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험을 본 두 곳에서 합격자 명단을 각각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
셋째, 전시방목은 최종 합격자 명단이다. 따라서 전시방목 합격자들은 모두 무과 급제자라고 불렀다. 무과는 문과와 함께 시험 보았으므로 문·무과방목이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를 용호방목(龍虎榜目)이라고 불렀다[『정조실록』 8년 9월 29일]. 보통 무과방목에는 기본적으로 시험일, 시험관, 시험 과목, 선발 인원수, 전시일, 출방일, 방방일, 사은일, 알성일 등의 날짜 등을 먼저 적고, 그다음에 갑과, 을과, 병과의 순서로 급제자 명단을 기록하였다. 급제자와 관련한 기재 사항은 우선 급제자의 순위를 적고, 직역과 이름, 나이, 본관, 거주지, 아버지의 직역과 이름, 생존 여부, 형제 관계 등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