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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조선시대 활쏘기의 목표물에는 다양한 표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관혁(貫革)은 네모난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어진 표적물이었다. 관혁이 활쏘기의 표적으로 자주 사용되면서, 민간에서는 관혁을 ‘과녁’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관혁은 과녁의 본딧말이 되었다.
[연원 및 변천]
관혁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성종 때이다. 1476년(성종 7) 별시무과의 전시에서 관혁이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성종실록』 7년 3월 21일]. 당시 ‘관혁 2시’라고 한 것으로 보아, 5시 중 2시 이상이라야 합격선에 들었던 것 같다. 그 뒤 관혁은 주로 별시무과의 전시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관혁은 시험 방법이 간단하여 응시자의 능력을 쉽게 측정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별시무과의 전시 과목으로 관혁이 채택된 이유이다. 『속대전』에 따르면, 관혁은 목표까지의 거리는 150보(180m)이다. 표적의 형태는 직사각형이고 길이는 10척 8촌(340㎝), 넓이는 8척 3촌(261㎝)이다. 정곡에 해당하는 관(貫)은 표적의 길이와 너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즉 관의 길이는 3척 6촌(113㎝)이고, 너비는 2척 7촌(87㎝)이다. 관혁은 편전과 같이 시험장에 2개를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관혁이 무과 전시의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관혁은 활쏘기 목표물의 대표적인 표적이 되었다. 오늘날 활쏘기 표적을 과녁이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심승구,「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학예지』7, 육군박물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