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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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文科)

서지사항
항목명문과(文科)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과거(科擧)
하위어도과(道科), 별시문과(別試文科), 식년문과(式年文科), 외방별과(外方別科), 외방별시(外方別試), 증광문과(增廣文科), 정시문과(庭試文科), 중시문과(重試文科)
관련어문관(文官), 제술업(製述業),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 무과(武科), 향시(鄕試), 한성시(漢城試), 관시(館試), 강서(講書), 제술(製述), 사서의(四書疑), 오경의(五經義), 배강(背講), 대책(對策), 전례강(典禮講), 유생과시(儒生課試), 직부회시(直赴會試), 직부전시(直赴殿試), 절일제(節日製), 황감제(黃柑製), 전강(殿講), 도기과(到記科), 응제(應製)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문관의 등용과 승진을 위한 시험.

[개설]
문과는 1393년(태조 2)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총 804회가 시행되었다. 804회의 문과 중에 문관을 등용을 위한 시험이 747회, 승진 시험이 57회로, 약 93%의 문과는 문관 등용을 위해서 시행되었다. 문관을 등용하기 위한 문과는 3년마다 식년(式年)에 행해지는 정기 시험과 왕의 품지가 있을 때 시행되는 비정기 시험이 있었다. 비정기 시험은 왕이 문묘에 참배한 이후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알성시(謁聖試), 국가와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에 별시(別試) 혹은 정시(庭試), 특정 지방민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외방별시 등 다양한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502년 동안 문관 등용을 위한 문과 747회 중 정기 시험인 식년문과는 총 162회가 시행되어, 5,996명이 합격하였고, 각종 비정기 시험은 585회가 시행되어 8,676명이 합격하였다.

[내용 및 특징]
문과는 고려시대의 제술업을 계승한 시험이었다. 958년(고려 광종 9)에 처음 시작된 고려 과거는 원 간섭기에 재정비되었다. 이때 정비된 과거제도는 조선시대 문과에도 영향을 끼쳤다.

첫째, 고려후기 제술업 시험의 가장 큰 변화는 시험 단계가 2단계에서 3단계로 늘어난 것이었다. 초시와 복시 2단계로 치르던 시험 외에 왕이 직접 시험하는 전시(殿試)를 더 두어서 3단계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과거는 예조에서 주관하여 ‘예부시’라고도 하였다. 관료를 선발하는 것은 왕의 권한이지만, 합격자 선발 과정에서 왕이 관여할 여지가 없었다. 시험 주관자인 지공거(知貢擧)는 좌주(座主)라고 하고, 시험 합격자는 자신을 선발한 지공거의 문생(門生)이라 하여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고려후기 충렬왕은 관료의 선발권이 예조나 지공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 있음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복시 합격자에게 다시 전시를 시행하고 전시 합격자를 ‘국왕문생’이라고 불렀다. 고려후기에 시작된 3단계 시험 방법은 조선시대 문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조선의 태종은 1413년(태종 13) 사사로이 당을 결성하는 폐단의 원인이 되는 좌주 문생의 제도를 폐지하는[『태종실록』 13년 1월 6일] 한편, 시관의 인원을 확대하였다. 고려시대의 시관은 지공거와 동지공거 등 2명이었던 것을 조선시대에는 3~7명의 시관을 둠으로써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맺기 어렵게 하였다.

둘째, 문과 합격 정원 역시 고려후기 제술업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고려시대 제술업 합격 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과거가 시행되던 초기에는 대체로 10명 미만이었던 것이 고려 선종(宣宗)대 이후로 20명 이상의 합격자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충렬왕대에는 을과 3명, 병과 7명, 동진사 23명, 총 33명으로 합격 인원이 고정되었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고 내린 교서에 문과에서 33명을 선발하여 탁용한다고 밝혔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고려후기 재정비된 과거제도를 바탕으로 조선의 문과는 응시 자격, 시험 종류, 시험 과목, 시험 절차 등이 상세히 정비되어 『경국대전』에 실렸다. 그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응시 자격

문관을 등용하기 위한 문과는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이하의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문과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경우는 영원히 서용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 공금을 횡령하거나 뇌물을 받은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再嫁)하였거나 행실이 나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의 자손 등이었다.

이외에 문과에 응시할 수는 있으나 제약이 따르는 계층이 있었는데, 바로 향리였다. 고려시대에는 향리 중 부호장(副戶長) 이상은 아들과 손자, 부호정(副戶正) 이상은 아들이 제술업에 응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향리는 고려 때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긴 하였으나 문과에 응시할 수는 있었다. 다만 향리가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응시자 등록 절차인 녹명(錄名)할 때에 자신의 사조단자(四祖單子) 이외에도 양반 관료의 보증서인 보단자(保單子)를 더 제출하여야 했다. 이것은 향리가 문과를 보기 위해서는 양반 관료의 동의하에서만 가능하였다는 의미로 조선의 향리의 지위를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2. 시험의 종류

문과는 3년에 1번 자(子)·묘(卯)·오(午)·유(酉)년에 해당되는 식년(式年)에 시행되는 정기 시험과 왕의 품지로 특별한 경우에 시행되는 비정기 시험이 있었다. 비정기 시험의 시행은 고려시대에는 없었던 조선 문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정기 시험은 식년문과라고 하였다. 식년문과는 합격 정원이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등 33명으로 법제화되어 있었다. 또한 식년문과는 초시·복시·전시 3단계 시험을 치러서 합격자를 내었다. 문과 합격 여부는 복시의 결과에서 알 수 있으며, 전시에서는 등위가 결정되었다.

비정기 시험은 특별한 경우에 왕의 품지로 치러졌다. 특별한 경우란 국가나 왕실의 경사가 있거나, 왕이 문묘에서 석전제를 지낸 후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을 치렀다. 대표적인 국가 경사는 왕의 즉위였다. 최초의 비정기 시험은 1401년 태종이 즉위하여 시행한 증광시였다. 그 이후에는 왕이 즉위할 때마다 증광시가 시행되었다. 이외에도 왕·왕세자의 가례, 왕세자의 탄생, 왕·왕대비·왕비 등이 병환에서 쾌차하였을 때 등의 경사가 있을 때에 증광시·별시·정시라는 이름으로 비정기 시험이 시행되었다. 비정기 시험은 주로 서울에서 시행되었으나, 특정 지방 거주자만을 대상으로 한 시험도 있었다. 왕이 특정 지방에 거둥하였을 때 외방별시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비정기 문과 중 별시·정시·외방별시 등은 3단계의 시험을 거치지 않으며, 합격 정원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1회의 시험 혹은 초시·전시 2단계의 시험으로 합격자가 결정되었다. 합격 인원도 식년문과보다 적었으며, 갑과는 1명만을 선발하였다.

식년문과와 각종 비정기 문과는 문관을 임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문관 승진을 위한 문과도 있었다. 이러한 문과는 중시(重試)라고 하였다. 중시는 거듭되는 시험이란 의미로, 태종이 1406년 문과에 합격한 이후 학업을 버리는 문사(文士)를 격려한다는 명분을 세워 중시법(重試法)을 마련하였고[『태종실록』 6년 5월 13일], 다음 해인 1407년(태종 7) 문과에 급제한 종3품 이하의 당하관을 대상으로 처음 중시를 실시하였다. 중시는 그 이후 1886년(고종 23)까지 10년 1회씩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3. 시험 과목

문과 시험은 강서(講書)과 제술(製述)로 구성되었다. 강서시험은 사서(四書)의 개념이나 글의 뜻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작성하게 하는 사서의(四書疑), 오경(五經)의 뜻을 묻는 오경의(五經義), 경서를 암송하는 배강(背講)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경서의 내용을 익혀서 실천하는 것을 중히 여겼으므로 강서시험과 실천 방안을 제시하는 대책(對策)을 중히 여겼다.

문과 시험 중 정기시인 식년문과는 이러한 성리학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식년문과 시험은 초시와 복시가 각각 초장(初場)·중장(中場)·종장(終場) 등 삼장(三場)으로 이루어졌다. 초장은 강서시험, 중장은 제술시험, 종장은 대책을 시험 과목으로 하였다. 초장의 강서시험은 초시에서는 사서·오경을 대상으로 의(疑)·의(義)·논(論) 중 2편을 작성하였으며, 복시 초장에서는 경서의 배강(背講)이 시행되었다. 중장은 고려 이후로 주로 사용되었던 부(賦)·송(頌)·명(銘)·잠(箴)·표(表)·전(箋) 등의 제술 과목이 배정되었는데, 부(賦)·송(頌)·명(銘)·잠(箴) 중 1편, 표(表)·전(箋) 중 1편 등 총 2편을 지어야 했다. 중장 시험은 초시와 복시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종장 시험 과목은 제술이긴 하나, 반드시 대책 1편을 작성하게 하였다. 문과 합격자가 결정된 후 등위를 정하는 전시의 시험 과목은 제술로서 대책·표·전·잠·송·제(制)·조(詔) 등의 과목 중에서 문제가 출제되었다.

반면 비정기 시험은 제술시험의 비중이 높았다. 식년문과와 같은 방식으로 치러지는 증광시도 복시의 경우 초장·중장으로만 되어 있으며 모두 제술로만 출제되었다. 3단계 시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정기 시험은 대체로 시험 과목이 제술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4. 시험 절차

문과의 시험 절차는 시험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 초시·복시·전시 등 3단계의 시험을 치르는 식년문과·증광문과의 절차가 가장 복잡하였다. 이들 시험의 초시는 응시자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치렀다.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은 향시(鄕試)를,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은 한성시(漢城試)를,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관시(館試)를 치렀다. 『경국대전』에 의거하면, 초시의 합격 정원 총 210명으로, 향시에서 경기 20명, 충청·전라 각 25명, 경상 30명, 강원·평안 각 15명, 황해·영안 각 10명 등 총 150명, 한성시에서 40명, 관시에서 50명을 선발하였다. 초시에서 합격한 210명은 서울의 2개 시험장에서 복시를 치러서 33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궁궐 뜰에서 왕이 친림한 가운데 전시를 치러 합격 등위가 결정되었다.

응시생들은 시험에 응시하기 전에 녹명(錄名)을 하였다. 녹명은 시험기일 10일 전에 마쳐야 했다[『예종실록』 1년 6월 11일]. 응시자들은 녹명할 때에 응시자의 성명, 본관, 거주지, 부·조·증조의 관직 및 이름, 외조의 관직·이름·본관을 기록한 사조단자(四祖單子)와 시권을 제출하였다. 녹명관은 응시자의 사조단자 기재 내용과 시지(試紙)의 기재 내용을 대조하고, 시지에 도장을 찍어서 돌려주었다. 문과 복시 녹명 때에는 『경국대전』·『주자가례』에 대한 강서시험에 통과하여야만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복시 녹명 때 치르는 시험을 전례강(典禮講)이라고 하였다.

[변천]
문과는 1393년(태조 2)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500년 동안 시행되었기 때문에 시험 응시 자격, 시험 시행 양상, 시험 과목 등에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1. 서얼과 서얼 자손 문과 응시

조선후기에는 『경국대전』에 문과 응시를 허락하지 않았던 서얼 그리고 그들의 자손에 대한 문과 응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서얼의 문과 응시 허락 여부에 대한 논의는 1553년(명종 8)부터 시작되었다. 명종이 서얼의 문과 응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요구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거쳐서 1555년(명종 11) 예조에서 ‘서얼허통사목’을 마련하였다[『명종실록』 11년 2월 4일]. 이 사목의 내용은 서얼 당사자에게 문과 응시를 허락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서얼이 양첩(良妾)의 소생일 경우 서얼의 손자부터 문과 응시를 허락하며, 녹명할 때 어머니와 할머니가 모두 양인(良人)인 것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제한적인 서얼 자손의 문과 허통은 인조대에 조금 더 확대되었다. 1625년(인조 3)에 만든 ‘서얼허통사목’에서는 양첩 소생 서얼의 손자부터, 천첩 소생 서얼은 증손부터 문과 응시를 허락한다는 것으로 천첩 소생 자손들에게도 문과 응시의 길이 열렸다[『인조실록』 11년 10월 15일]. 1696년(숙종 22)에는 서얼 당사자에게도 ‘업유(業儒)’라는 직역으로 문과 응시를 허락함으로써, 서얼과 그 자손들의 문과 응시가 법적으로 허락되었다.

2. 비정기 시험과 유생과시의 잦은 설행

비정기 시험은 조선초기 태종대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자주 시행되지는 않았다. 비정기 시험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대였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이반된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서 비정기 시험을 자주 시행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매년 평균 1.5회의 비정기 시험이 시행되었다. 16세기에는 중종대에 매년 1회 이상의 비정기 시험이 시행되었으며, 선조대 이후로는 모든 왕이 매년 1회 이상의 비정기 시험을 시행하였다.

이처럼 비정기 시험이 자주 설행된 것은 17세기 이후 문과는 단순히 문관 등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위무(慰撫)의 성격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 문과에 응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조선후기 양반 신분을 유지하려는 지배층은 물론이고, 새롭게 지배 계층으로 상승하려는 계층에서 문과에 응시하기를 원하였다. 왕들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잦은 시험이 많은 폐단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정기 시험의 시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선후기에는 정식 문과 시험은 아니지만, 문과 합격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확대되었다. 유생들의 학문 권장을 위해서 시행되었던 유생과시(儒生課試)에서 우등한 사람에게 회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회시(直赴會試), 혹은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이 주어졌다. 특히 직부전시의 특전이 주어지는 유생과시가 조선후기에는 급증하였다. 유생과시는 성균관 유생 혹은 전국의 유생을 대상으로 절일제(節日製), 황감제(黃柑製), 전강(殿講)·도기과(到記科)·응제(應製) 등의 명칭으로 시행되었다. 직부회시나 직부전시로 문과에 합격한 인원이 2,344명이었다. 그중 인조대 이후 특전을 받아서 문과에 합격한 인원이 2,294명으로 직부 특전을 받아 문과에 합격한 인원의 98%가 조선후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3. 시험 과목의 축소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던 초장과 중장의 시험 과목이 조선후기에는 축소되었다. 초장의 강서시험에서는 사서(四書)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중장의 제술시험에서는 각종 문체 중 부(賦)만을 남겨 놓았다. 전시에서의 시험 과목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문체 외에도 논(論)·부(賦)·명(銘)이 추가되었다. 조선후기 전시 제술시험에 사용된 문체는 대책보다는 부·표·전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중시 급제자 연구」, 『역사와 실학』 39, 역사실학회, 2009.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직부제 운영 실태와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3, 조선시대사학회, 2012.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 [집필자] 원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