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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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성시(謁聖試)

서지사항
항목명알성시(謁聖試)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과거(科擧)
하위어알성문과(謁聖文科), 알성무과(謁聖武科)
동의어알성과(謁聖科)
관련어문과(文科), 무과(武科), 친림시(親臨試), 작헌례(爵獻禮)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이 성균관 문묘에 나가 작헌례를 한 다음 실시하는 문·무과 시험.

[개설]
1414년(태종 14)에 처음 실시되었다. 알성시에는 문과와 무과만 있었다. 왕이 친림(親臨)하여 거행되었으며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시험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조선시대에 설행된 알성시는 모두 97회이며 문과에서 778명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알성무과의 총 합격 인원은 알 수 없었다.

[내용 및 특징]
알성시는 왕이 성균관 문묘에 나아가 공자(孔子)의 신위에 술을 올리는 작헌례를 한 다음 실시하는 시험으로 초시(初試)가 없으며 당일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알성시가 처음 실시된 1414년(태종 14)에는 성균관 유생뿐 아니라 4품 이하의 관원으로 시험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응시 자격을 주었다. 왕이 성균관에서 작헌례를 하고 이어서 명륜당에 나아가 친히 시무를 책문(策問)하였는데, 시험에 응한 사람은 모두 540여 명이었다[『태종실록』 14년 7월 13일][『태종실록』 14년 7월 17일].

일반적으로 국상(國喪) 3년을 마친 뒤에 왕이 성균관에 가서 알성하고[『중종실록』 29년 윤2월 3일],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한 뒤에도 알성하는 관례가 있었다[『명종실록』 2년 9월 9일]. 알성은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를 하는 것을 일컬었다. 알성을 하고 나면 으레 사람을 뽑았다.

알성문과는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였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은 원래 시험일 다음 날에 하였으나 1477년(성종 8)부터는 시험 당일에 하였다. 성균관에 적(籍)이 올라 있는 유생들에게 재학한 일수를 계산하여 응시하게 하였다가 인재를 뽑는 길이 넓지 못하다 하여 지방의 유생과 조사(朝士)도 모두 응시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성종실록』 6년 2월 18일]. 전국의 유생들에게 문호가 개방되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시험장을 관리하기 어려워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시험 시간이 짧아 제대로 능력을 측정할 수 없는 폐단도 있었다.

시험 장소는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춘당대(春塘臺)·경무대(景武臺) 등이었다. 선발 인원은 『속대전』에 왕의 품지에 의한다 하였지만 실제 문과방목에 의하면 1414년(태종 14) 처음 실시에서 26명을 선발한 것을 비롯하여 1434년(세종 16)에 25명, 1454년(단종 2)에 33명을 뽑았으나 적게는 3~4명을 뽑기도 하였다. 이처럼 15세기에는 선발 인원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16세기 이후에는 1515년(중종 10)에 15명을 선발한 경우와 선조 연간의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10명 이하를 선발하였다.

시험 과목은 『속대전』에 대책(對策)·표(表)·전(箋)·조(詔)·제(制)·논(論)·부(賦)·잠(箴)·명(銘)·송(頌) 중 1편을 제술로 시험한다 하였으나 실제로 숙종 연간에는 언제나 표문(表文)을 출제하여 서울 유생들에게 유리하였다. 사륙변려문(四六駢儷文)을 익히지 못하고 경서 위주로 공부한 지방의 유생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능한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 치우치지 않게 논(論)과 책(策), 부(賦) 등도 출제할 것이 요청되었다[『숙종실록』 19년 8월 6일].

알성시에 급제하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 유생이고, 지방 유생은 한 사람도 합격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724년(영조 즉위년) 부와 책을 주로 익힌 지방의 유생들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부·표로, 혹은 논·책으로 두 제목을 나누어 내고, 만약 10명을 등용할 경우 각기 5명씩 등용한다면, 경향(京鄕)의 선비들을 두루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1월 24일].

시험 당일에 방방하기 때문에 다른 전시(殿試)에 비하여 시관의 수가 많았다. 『속대전』에 의하면 시험문제를 고시하고 읽어 주는 시험관 독권관(讀券官) 10명, 응시자들의 질문에 응대하는 관원으로 독권관 보좌역 대독관(對讀官) 20명이었다. 1732년(영조 8)에는 시험관을 3명으로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영조실록』 8년 10월 4일].

알성문과는 부자나 형제간이라도 상피할 필요가 없었고, 성균관·예문관·승문원·교서관 사관(四館)에서 녹명(錄名)하는 일도 없었다[『현종실록』 1년 10월 17일][『숙종실록』 22년 8월 22일].

알성시를 처음 실시할 때에는 문과만 실시하였다. 무성묘(武成廟)가 없었기 때문이다. 1431년(세종 13)에 훈련관 북쪽에 무성묘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문신들이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1434년(세종 16)부터 문무가 일체이니 알성무과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무과도 알성시를 함께 실시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16년 2월 29일]. 세종이 모화관에 나아가 기사(騎射)와 격구(擊毬), 보사(步射)를 시험한 다음 경서(經書)와 무경(武經)을 강(講)하였다[『세종실록』 16년 3월 8일].

알성무과의 절차는 초시(初試)와 전시(殿試) 두 단계가 있었다. 초시의 시험장은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1소는 훈련원, 2소는 모화관에서 실시하였다. 『속대전』에 의하면 초시와 전시에 관한 규정은 정시(庭試)와 같았다. 각 시험장마다 시관 3명, 참시관 3명, 감시관 1명을 파견하였다. 시관은 2품 이상 문관 1명과 무관 2명이며, 참시관은 당하 문관 1명고 당하 무관 2명이었다. 감시관은 사헌부·사간원 감찰 가운데 1명으로 임명하였다.

과목은 목전(木箭)·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관혁(貫革)·격구(擊毬)·기창(騎槍)·조총(鳥銃)·편추(鞭芻)·강서(講書) 등 11과목 가운데 왕의 낙점을 받아 두 가지 또는 세 가지로 하였다.

선발 인원은 초시는 2개소에서 각각 50명씩 뽑게 하고, 전시는 왕이 친림하여 정하였다. 합격 인원은 일정하지 않았으나 알성문과보다는 알성무과에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하였다. 1624년(인조 2)에는 문과에 4명, 무과에 6명을 선발하여[『인조실록』 2년 10월 19일] 큰 차이는 없었으나 1803년(순조 3)에는 문과에 3명, 무과에 27명을 뽑았다[『순조실록』 3년 4월 10일]. 무과에서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더욱 두드러져 1838년(헌종 4)에는 문과에 3명, 무과에 71명을 뽑았다[『헌종실록』 4년 4월 21일]. 1872년(고종 9)에는 문과에 5명, 무과에 163명을 뽑았다[『고종실록』 9년 2월 4일].

[변천]
알성문과에 전국의 유생들에게 응시 기회를 주게 되면 수만 명 이상이 몰려들어 대 혼잡을 이루었다. 그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알성시에 초시를 실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알성문과의 운영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알성무과는 처음 실시된 1434년에는 기사(騎射)·격구(擊毬)·보사(步射)를 보고 그다음에 『오경』·『사서』·『통감』·『장감박의(將鑑博議)』·『소학』·『무경칠서(武經七書)』중에서 자원에 따라 1과목을 강(講)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6년 3월 4일]. 이후의 변화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속대전』에서의 과목을 보면 무예 위주로 강화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index.aks/.

■ [집필자] 최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