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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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시(別試)

서지사항
항목명별시(別試)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과거(科擧)
하위어별시문과(別試文科), 별시무과(別試武科)
관련어병년(丙年), 중시(重試), 증광시(增廣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 외방별시(外方別試)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중시의 대거 형식으로 보는 문무과.

[개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丙年)마다 한 번씩 시행하는 중시의 대거(對擧)로 시행하였다. 문과와 무과에만 별시가 있으며 초시와 전시 2단계의 시험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두 곳으로 나누어 보았으며 경우에 따라서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 설행하였다. 흉년으로 유생들의 서울 왕래에 폐단이 우려될 때에 향시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초시는 초장과 종장 두 단계로 치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과거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시험과 비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시험으로 나뉘었다. 정기 시험에는 3년에 한 번씩 시행되는 식년시와 10년마다 실시되는 중시(重試)가 있었다. 비정기 시험을 포괄적으로 별시라고도 부르는데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외방별시(外方別試) 등이 포함되었다. 식년시와 증광시는 문과와 무과, 생원진사시와 잡과가 모두 설행되고 그 외의 각종 별시는 문과와 무과에만 시행되었다. 증광시는 비정기 시험이지만 절차나 시험 과목, 정원 등이 식년시와 같이 운영되었다.

증광시는 태종 즉위 기념으로 처음 실시된 후 선조 이전까지는 왕의 즉위 기념으로만 설행되었다. 조선초에는 증광시에 대한 법규가 갖추어지지 않아 증광시를 별시라고도 지칭하였다. 태종 즉위년의 과거와 문종 즉위 기념 과거를 실록에서는 별시로 칭하였다[『문종실록』즉위년 11월 3일][『문종실록』 1년 4월 8일]. 『국조문과방목』에는 태종 즉위년 과거는 ‘신사증광방(辛巳增廣榜)’, 문종 즉위년 과거는 ‘신미증광방(辛未增廣榜)’으로 발표하였다.

별시를 별시라 칭한 사례는 태종대부터 보였다. 1416년(태종 16)에 서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문과와 무과 별시를 시행하였고[『태종실록』 16년 8월 2일], 세종대인 1439년(세종 21)·1442년(세종 24)·1447년(세종 29)에 별시를 설행하였다고 하였는데[『문종실록』 1년 4월 8일], 이 시험은 모두 증광시가 아닌 별시를 지칭한 것이었다.

『국조문과방목』에 별시방(別試榜)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57년(세조 3)이었다.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조선 전 시기를 통하여 설행된 804회의 문과 중 식년시가 163회, 증광시가 67회, 중시가 52회, 별시가 126회였다. 별시는 세조 연간에 4회, 성종 연간에 9회, 연산군대에 6회, 중종 연간에 25회, 선조 연간에 19회가 설행되었다. 중종 연간에는 거의 매년 별시가 설행되었을 정도로 자주 있었다.

별시 설행 동기는 중시(重試)의 대거로 실시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과거인 경과(慶科)로 설행되었다. 별시 설행의 원인이 되는 경사로는 황제의 등극, 태자의 탄생, 왕비·왕세자의 책봉, 세자의 입학·가례(嘉禮), 원자(元子)·원손(元孫)의 탄생, 친경(親耕)·친잠(親蠶), 부태묘(祔太廟)·존숭(尊崇), 토역(討逆) 등이 있었다[『영조실록』 4년 9월 24일].

처음에 별시는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그러한 별시가 자주 설행되면서 유생들은 강경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는 폐단을 시정하고자 별시에 초시를 두고 초시에 강경을 시험하자는 논의가 성종대부터 시작되었다. 명종대에 와서 별시에서 강경이 정례화되고 초시와 전시의 절차를 갖추게 되었다.

별시는 정해진 법규가 없어 시험이 있을 때마다 시험 방법이나 과목·인원 등을 결정하였다가 『속대전』에서 정비되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별시문과초시는 서울에서 보고 시험장은 2개소로 나누었다. 시관은 종2품 이상 관원 3명, 정3품 이하 관원 4명으로 구성되었다. 초시의 정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정원은 300명 또는 600명으로 하고 그때마다 왕에게 아뢰어 결정하였다. 시험 과목은 초장은 논(論) 1편과 표(表)·전(箋) 중 1편, 부(賦) 1편으로 하고 윤번으로 2가지 문제를 냈다. 종장은 대책(對策) 1편이었다.

초시에서 600명을 뽑을 경우 서울은 2개소로 나누어 각기 150명을 뽑고, 경기는 40명을 뽑되 서울 인원에 합하였다. 나머지 260명은 전라도와 충청도는 각 50명, 경상도는 60명, 강원도와 평안도는 각 30명, 함경도와 황해도는 각 20명을 뽑도록 하였다[『현종실록』 13년 1월 20일].

초시를 마치고 회강(會講)에서 강서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사서에서 추첨한 1서와 삼경 중 1서를 자원하여 배송으로 하여 조(粗) 이상을 얻어야 했다. 별시문과전시의 과목은 대책(對策)·표(表)·전(箋)·조(詔)·제(制)·논(論)·부(賦)·잠(箴)·명(銘)과 송(頌) 중 1편을 제술로 시험하였다. 별시문과전시의 정원은 실시할 때마다 왕에게 아뢰어 결정하였다.

별시는 무과에서 훨씬 많은 인원을 뽑았다. 1556년(명종 11) 별시에서 문과는 12명을 뽑았는데 무과는 200명을 뽑았다. 무과에서 더 많이 뽑은 것은 변방에 기용하거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명종실록』 11년 2월 20일]. 특히 임진왜란 중에는 무과에서 월등히 많은 인원을 뽑았다. 1595년(선조 28) 해서(海西)에서 실시한 별시에서 문과는 3명을 뽑았는데 무과는 574명을 뽑았다[『선조실록』 28년 11월 18일].

무과별시는 초시에서부터 많이 뽑았다. 초시 인원은 혹 100~200명이 정원이라고 하는데, 계미년에는 초시에 1,000명을 뽑아 전시에서 500명을 취하였고, 갑신년에는 초시에서 500명을 뽑아 전시에 200명을 취하였으며, 신묘년에는 초시에 1,000명을 취하여 전시에 300명을 뽑았다[『선조실록』 30년 2월 17일].

무과별시에서 더 많은 인원을 뽑은 것은 19세기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1806년(순조 6) 문과별시에서는 3명, 무과별시에서는 152명을 뽑았다[『순조실록 』6년 3월 10일]. 1892년(고종29) 별시문과에서 20명, 무과에서 216명을 뽑았다[『고종실록』 29년 3월 27일].

이러한 현상은 별시에 정해진 인원이 없어 상황에 따라 달리 뽑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조선후기에 문과보다 무과의 인원을 늘려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려 한 경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무과별시의 시험 과목은 초시에서는 목전(木箭)·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관혁(貫革)·격구(擊毬)·기창(騎槍)·조총(鳥銃)·편추(鞭芻)·강서(講書) 11과목 중에 왕의 낙점을 받아 2가지 또는 3가지로 하였다. 별시무과전시의 시험 과목도 초시의 과목과 같았다.

[변천]
별시 설행의 동기가 15세기에는 부묘, 알성, 세자 탄생과 책례(冊禮) 경축, 중국 황제의 등극 경축 등이었다. 16세기에는 친경(親耕), 종계(宗系) 개정, 종계 변무(辨誣), 중시 대거 등으로 설행 동기가 점차 확대되어 갔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 [집필자] 최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