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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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권관(讀券官)

서지사항
항목명독권관(讀券官)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과거(科擧)
관련어대독관(對讀官), 시관(試官), 시권(試券), 알성시(謁聖試), 전시(殿試), 정시(庭試), 중시(重試), 친시(親試)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이 주관하는 문과 전시와 친시의 상급 시관.

[개설]
문과 전시(文科殿試)·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중시(重試) 등 왕이 직접 주관하는 시험의 시관(試官)으로 시험의 출제·감독·채점·선발 등을 담당하였다. 2품 이상의 관원이 담당하였다. 독권관이라는 명칭은 응시자의 시험 답안인 시권(試券)을 읽어 준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담당 직무]
왕이 친히 주관하는 문과 전시나 알성시·정시·중시 등에서 왕을 대신하여 출제·감독· 채점 등을 주관하고 우수한 답안을 왕에게 추천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보다 하급의 관료인 대독관이 독권관을 보좌하였다.

[변천]
독권관은 원래 중국 송나라 때 처음 도입된 전시(殿試)의 시관을 일컬었다. 『고려사』에는 977년(경종 2) 경종이 친시(親試)를 시행하면서 왕융(王融)을 독권관으로 삼았으며, 친시의 경우에는 독권관으로 칭한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이외에는 독권관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고려에서는 전시나 친시가 제도화되지 않았고,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선발을 담당하였다.

조선은 태조대부터 전시를 제도화하였으나 전시의 시관을 별도로 두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407년(태종 7) 문신 친시 때 독권관과 대독관을 시관으로 두었으며[『태종실록』 7년 4월 18일], 이어 시행된 1408년(태종 8)과 1411년(태종 11)의 식년시 전시 때도 독권관을 따로 두었다.

그러나 이때의 독권관은 지공거나 동지공거에 비하여 권위가 낮았다. 예를 들어 1411년 식년시의 지공거는 영의정 하륜(河崙), 동지공거는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이었던데 비하여 전시 독권관은 병조참의 유백순(柳伯淳)이었다. 그러나 1413년(태종 13) 지공거와 동지공거의 제도를 혁파하고 예조가 과거를 주관하게 되면서 전시 독권관은 최고 시관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1414년(태종 14) 식년시 전시의 독권관은 좌의정 하륜 등이었다.

세종대에는 전시 독권관을 예조·예문관·집현전의 2품 이상 관원 중에서 선임하도록 하였는데[『세종실록』 「오례」 가례의식 문과전시의], 『속대전』에는 문과 전시와 중시의 독권관은 의정(議政) 1명과 종 2품 이상 관원 2명 등 3명, 시험 당일 급제자를 발표하는 알성시·정시 등의 독권관은 10명을 선임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속대전(續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2000.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허흥식, 『고려의 과거제도』, 일조각, 2005.

■ [집필자] 박현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