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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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부전시(直赴殿試)

서지사항
항목명직부전시(直赴殿試)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과거(科擧)
관련어급분(給分), 직부회시(直赴會試), 과시(課試), 전강(殿講), 춘추도기(春秋到記), 절일제(節日製), 황감제(黃柑製)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정규 과거 이외의 특별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을 때 초시·회시를 거치지 않고 전시에 나아가게 하는 특전.

[개설]
문과의 경우 직부전시란 정규 과거 이외에 시행하는 과시(課試), 즉 전강(殿講)·춘추도기(春秋到記)·절일제(節日製)·황감제(黃柑製) 등 각종 특별 시험이나, 또는 지방 유생들에게 시행하는 특별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에게 초시·회시를 거치지 않고 전시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하였다. 무과의 경우는 지역별 분야별로 각종 시험이 다양하게 있어 이에 따라 내려질 수 있는 직부전시의 종류가 매우 많았다.

[내용 및 특징]
정규 과거 이외의 각종 과시에서 성적의 고하에 따라 직부전시·직부회시(直赴會試)·급분(給分) 등의 시상을 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직부전시였다. 이에 대한 증명서를 승정원에서 발행하여 해당자에게 지급하였는데 이를 직부첩이라고 하였다. 박이양의 직부전시첩에 보이듯이 왕이 친림(親臨)한 경우나 특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직부전시를 주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성균관 과시(課試)는 직부전시라는 특전까지 받을 수 있는 특별 시험이므로 기준 원점(準點)을 채운 관학유생에 한해서 참여할 수 있는 게 원칙이었으나, 왕의 특명에 의하여 참여 제한을 두지 않는 통방외(通方外)로 시행할 경우에는 원점에 상관없이 생원·진사나 사학승보생이 아니라도 참여할 수 있었다.

아래 직부전시첩을 받은 박이양도 생원이나 진사가 아니었지만 통방외로 시행된 경전에 대한 구술시험 전강(殿講)이었으므로 유학으로서 참여하여 수석을 차지한 결과 직부전시의 특전을 받은 것이었다. 또한 전강이 통방외로 시행될 경우는 많은 유생들이 참여하는 탓에 구술시험으로는 평가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므로 대신 제술로 치러졌다.

##00016210_그림1_박이양의 직부전시첩, 1880년

전시에서는 등수만 결정하는 것이므로, 직부전시자는 사실상 문과에 급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지만 식년문과전시를 기다렸다가 전시에 참여하여 답안을 성편(成篇)하고 제출해야 합격증[홍패(紅牌)]를 받았다. 당초에는 직부전시자를 식년문과의 합격 정원 33명에 포함시켰으나 나중에 정원 외로 처리하였다[『명종실록』 4년 9월 21일].

[변천]
직부전시의 제도는, 과시(課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유생에게 전시에 직부하는 특혜를 줌으로써 성균관의 교육을 진흥시키려는 방책으로 모색되고 마련되었다.

당초에 중앙과 지방의 학교에 대한 권학책으로 직부 규정을 마련한 것은 직부회시제도였다. 1433년(세종 15)에 태학 유생들 가운데(중) 3년간의 성적을 통산하여 우등유생 5인을(5명을) 문과회시에 직부하는 규정을 마련한 것이었다[『세종실록』 15년 8월 22일][『세종실록』 15년 9월 11일].

이러한 직부법은 1444년(세종 26) 혁파되었다가[『세종실록』 26년 2월 4일], 1459년(세조 5) 성균관의 삼일제와 구일제 춘추과시(春秋課試)에 따른 문과 직부회시법이 다시 시행된[『세조실록』 5년 7월 9일] 직후부터 문과 직부전시의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세조실록』 7년 1월 25일].

직부전시자는 식년시 전시에 직부하는 게 원칙이었으나[『중종실록』 34년 11월 23일] 식년시 정원 33명을 침식하는 탓에 증광시나 별시전시에 붙이기도 하다가 직부전시 인원은 정원 외로 처리하게 되었다[『명종실록』 4년 9월 21일].

직부전시 인원을 정원 외로 처리하기 이전에 식년시에서 정원을 초과하여 급제시킨 경우는, 직부전시의 기록이 나타난 이후 1501년(연산군 7)에 35인이 유일하고, 정원 외로 처리한 이후에 식년시나 증광시의 정원을 초과하여 급제시킨 사례가 종종 나타나게 되었다.

과거에 응시하기 어려운 변방의 유생들에게 특별 시험을 실시하여 직부전시를 주는 조치도 취해졌는데, 제주의 경우 1623년(인조 1) 관리를 파견하여 시험을 시행한 후 시권을 거두어 대제학으로 하여금 석차를 정하여 오섬(吳暹)에게 직부전시를 내린 게 최초이며[『인조실록』 1년 윤10월 2일], 평안도의 경우 1643년(인조 21)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김여욱(金汝旭) 등 4명에게 직부전시를 내렸다[『인조실록』 21년 2월 28일]. 숙종대에는 특별 시험을 시행하는 해당 지역[함경도]에서 바로 방방(放榜)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은대편고(銀臺便攷)』
■ 김경용, 「조선시대 과거제도 시행의 법규와 실제」, 『교육법학연구』 제16권 2호, 대한교육학회, 2004.
■ 김경용, 『장서각수집 교육·과거관련 고문서 해제(권1)』(장서각연구총서 2), 민속원, 2008.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직부제 운영 실태와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제63집, 조선시대사학회, 2012.
■ 조좌호, 「학제(學制)와 과거제」,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편, 1977.
■ 최광만, 「17세기 과시제도의 형성과정」, 『교육사학연구』 제22집 2호, 한국교육사학회, 2012.
■ 최광만, 「조선전기 과시의 신설과정」, 『교육사학연구』 제23집 2호, 한국교육사학회, 2013.

■ [집필자] 김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