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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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역(碁原驛)

서지사항
항목명기원역(碁原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거산도(居山道)
동의어기원역(基原驛), 기원참(碁園站), 파독지참(波獨只站)
관련어단천군(端川郡), 역도(驛道), 역로(驛路)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함경도 단천에 위치했던 역.

[개설]
기원역(碁原驛)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단천군 남쪽 3리(약 1.2㎞) 지점에 위치하였다. 기원역(基原驛)이라고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신설된 역(驛)이었다. 조선시대 기원역은 거산도(居山道)의 소속 역으로 편성되었다.

[내용 및 변천]
기원역이 위치했던 단천 지역은 천리장성 외부에 있어 고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으나, 고려말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영토로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기원역은 1409년(태종 9)에 신설되었다고 하는데[『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단천군], 1398년(태조 7)에 기존의 파독지참(波獨只站)을 기원참(碁園站)으로 개명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므로[『태조실록』 7년 2월 3일], 기원역의 기원은 조선 개창 전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역들은 남쪽의 안변 지역으로부터 북쪽의 두만강 연안에 이르기까지 해안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편성된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이 역들에 대한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을 거친 후에 고산도(高山道)·거산도(居山道)·수성도(輸城道) 등 3개의 역도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함경도의 역들이 모두 이 3개의 역도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원역은 시리도(施利道) 소속으로 기록되었지만[『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이후 몇 차례의 역도 개편을 통해 『경국대전』에 기원역은 거산도 소속의 역으로 기록되었다. 『대전회통』에도 변함없이 기원역은 거산도에 소속되었다.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했으나, 거산도는 대체로 남쪽의 홍원에서 동북쪽으로는 명천, 북쪽으로는 갑산 사이에 위치한 역들로 편성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기원역에는 상등마(上等馬) 3마리, 중등마(中等馬) 8마리, 하등마(下等馬) 13마리와 역리(驛吏) 419명, 역노(驛奴) 621명, 역비(驛婢) 26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기원역은 서남쪽으로는 이성·북청 방면, 동북쪽으로는 길주 방면과 연결되는 한양~경흥 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기원역에서는 서남쪽으로 이성 곡구역(谷口驛), 동북쪽으로 단천 마곡역(麻谷驛, 磨谷驛) 등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기원역도 폐지되었다.

기원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함경남도 단천시 령산리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구총수(戶口總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 [집필자] 정요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