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경자자(庚子字)는 조선시대에 주조된 금속활자 중 계미자(癸未字)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활자이다. 1420년(세종 2)에 이천(李蕆), 남급(南汲) 등의 주도 아래 주자소에서 만들어졌다. 이 활자를 사용해서 찍은 인본(印本)을 경자자본(庚子字本)이라고 칭한다. 글자본은 경연청에 소장하고 있던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좌씨전』을 토대로 하였고, 약 7개월 간에 걸쳐 활자가 완성되었다. 주조기술과 조판기술이 계미자에 비해 개선되기는 했지만, 인출할 수 있는 양이 20여 장에 불과했고 글자가 작아 열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1434년(세종 16)에 세종이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도록 했는데, 그 활자가 바로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갑인자 계열 금속활자의 하나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이다.
[내용 및 특징]
1403년(태종 3)에 태종은 서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주자소의 설치를 명하고 조선시대 최초의 활자인 계미자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이직(李稷), 민무질(閔無疾), 박석명(朴錫命), 이응(李膺) 등의 주관하에 수개월에 걸쳐 계미자 수십만 자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계미자는 활자 모양이 정교하지 못했고, 활자를 구리판에 배열한 후에 가열한 황랍(黃蠟)을 부어서 단단히 굳으면 먹을 칠해 찍어 냈기 때문에 밀랍이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활자가 쉽게 흔들려서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종이의 양이 두어 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1420년(세종 2) 11월에 세종이 공조 참판 이천과 전 소윤 남급에게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활자와 구리판을 주조하도록 명하였고, 지신사(知申事) 김익정(金益精)과 좌대언(左代言) 정초(鄭招) 등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여 약 7개월의 공역을 거쳐 활자를 완성하였다.
경자자에서는 글자의 모양에 맞게 구리판을 다시 제작하였기 때문에 밀랍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가 매우 편리했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 그러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경자자본을 인출할 당시에도 여전히 밀랍을 사용하였고, 갑인자에 와서야 대나무를 사용하여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상반된 기록으로 인해 경자자를 조판할 당시에 실제로 밀랍을 사용했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경자자는 계미자에서 드러난 조판상의 문제를 상당 부분 개선하여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종이의 양이 계미자의 10배가 넘는 20여 장에 이르렀다.[『세종실록』 4년 10월 29일].
김종직이 작성한 신주자발(新鑄字跋)에 따르면 경자자의 글자체는 계미자본과 같이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고주본 『시경』·『서경』·『좌씨전』의 글자체를 토대로 하였다. 그러나 계미자본이 남송 촉본(蜀本)에서 볼 수 있는 구양순체(歐陽詢體)와 원필(圓筆)이 곁들어진 글자체라면, 경자자본은 원대(元代)에 간행한 서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자체로 계미자보다 글자체가 훨씬 작고 원필이 더욱 두드러진다.
경자자본은 독특한 글자체 외에도 행자수와 어미 및 인판틀의 모양이 판종을 구분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컨대 한 면에 들어가는 행자수는 대체로 11행 21자이며, 판심은 상하에 흑어미(黑魚尾)가 있고, 인판틀은 네 모퉁이가 붙어 있는 고착식 철우리를 사용했다. 예외적으로 소자본(小字本)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경우에는 16행 18자로 되어 있다.
경자자는 주조기술과 조판방식에서 계미자의 단점을 대폭 보완하기는 했지만, 글자체가 작고 조밀한 탓에 대자본(大字本)을 다시 봐야 해서 불편했다. 이에 1434년(세종 16)에 세종이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騭)』·『논어(論語)』 등의 서적을 글자본으로 삼고 부족한 글자는 진양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에게 쓰도록 하여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도록 하였다. 이에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 직집현전(直集賢殿) 김빈(金鑌),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 첨지(僉知) 사역원사(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 정척(鄭陟), 봉상주부(奉常注簿) 이순지(李純之), 훈련관(訓鍊觀) 참군(參軍) 이의장(李義長) 등의 주도하에 20여만 자에 달하는 활자를 만들었다. 이 활자의 주조로 인해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종이의 양은 경자자의 2배인 40여 장에 이르게 되었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 당시에 만든 활자가 바로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가장 여러 차례 개주(改鑄)되었던 갑인자(甲寅字)의 일종인 초주갑인자이다.
경자자가 주조되자 세종은 주자소에 특별히 술 120병을 내려 그들을 독려하는 한편, 자주 주자소에 술과 고기를 내려 주었다[『세종실록』 3년 3월 24일]. 현전하는 경자자본은 대략 20여 종이 남아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서적은 1420~1424년과 1428년 무렵에 두 차례나 인출되었던 『자치통감강목』이다. 특히 1428년경의 인본은 2014년 10월에 중국 상해도서관에서 최초로 발견한 서적으로, 59권 59책의 전질을 모두 갖춘 유일한 서적이다. 그 밖에 1423년에 인출한 『전한서(前漢書)』[『세종실록』 5년 6월 23일]와 『송조명현오백가파방대전문수(宋朝名賢五百家播芳大全文粹)』[『세종실록』 6년 1월 11일], 1425년에 인출한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세종실록』 7년 1월 17일]와 『사기(史記)』[『세종실록』 7년 1월 24일][『세종실록』 7년 11월 8일], 1428년에 인출한 『서산선생진문충공문장정종(西山先生眞文忠公文章正宗)』과 『초사(楚辭)』[『세종실록』 10년 11월 12일], 1429년에 인출한 『신전결과고금원류지론(新箋決科古今源流至論)』[『세종실록』 11년 5월 28일]과 『문공주선생감흥시(文公朱先生感興詩)』, 『논어집주대전』, 『소학대문토(小學大文吐)』, 『진서산독서기을집상대학연의(眞西山讀書記乙集上大學衍義)』, 『문선(文選)』,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고부(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古賦)』, 소자본(小字本)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을 비롯하여 서문만을 계미자로 찍어낸 『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 『통감속편(通鑑續編)』, 『중신교정입주부음통감외기(重新校正入註附音通鑑外記)』도 있다.
그 밖에 현전하지는 않지만 기록을 통해 1423년(세종 5)에 찍은 『자치통감강목속편(資治通鑑綱目續編)』, 『전한서(前漢書)』와 함께 사역원 학습용으로 찍은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후한서(後漢書)』·『직해효경(直解孝經)』, 1424년경에 찍은 『대학대전(大學大全)』 등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