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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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守藏)

서지사항
항목명수장(守藏)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교서관(校書館)
동의어수장(守欌)
관련어장책제원(粧冊諸員)
분야교육 출판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교서관에 소속되어 활자를 보관하는 업무를 맡은 잡직.

[개설]
수장제원(守藏諸員)은 장책제원(粧冊諸員)과 함께 교서관(校書館)에 소속되어 근무하는 잡직으로, 여러 활자를 궤에 나누어 보관하는 업무 및 금속 활자를 조판할 때에 원고의 글자에 따라 활자를 인판틀에 벌려 놓는 작업을 담당한 역원(役員)을 말한다. 『경국대전』을 보면 교서관의 관원은 제조(提調) 2명, 판교(判校) 1명, 별좌(別坐)와 별제(別提) 4명, 박사(博士) 2명, 저작(著作) 2명, 정자(正字) 2명, 부정자(副正字) 2명이 있고, 잡직은 수장제원 44명, 장책제원 20명을 두었다. 수장제원과 장책제원은 두 개의 번으로 나누어 근무하였는데, 근무일수가 900일이 되면 품계를 올려 주었고, 종6품이 되면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출근일수가 많으면 각각 2명씩을 서반으로 보내 등용하고, 계속 근무하려는 사람의 경우에는 출근일수가 193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 주되 정3품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수장제원의 체아직으로 종8품의 사준(司准) 1원과 종9품의 사감(司勘) 1원을 두었다. 교서관에 소속된 장인은 야장(冶匠) 6명, 균자장(均字匠) 40명, 인출장(印出匠) 20명, 각자장(刻字匠) 14명, 주장(鑄匠) 8명, 조각장(雕刻匠) 8명, 목장(木匠) 2명, 지장(紙匠) 4명이다.

[담당 직무]
교서관에서 금속 활자를 조판하고 인출하는 데 중요한 관원과 장인으로는 수장(守藏)을 비롯하여 창준(唱準), 균자장, 인출장이 있다. 창준은 인출하고자 하는 원고를 소리 내어 읽는 관원이며, 수장은 창준이 불러 준 활자를 벌려 놓는 관원이며, 균자장은 벌려 놓은 활자를 대나무나 파지(破紙)로 글자의 틈을 메워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장인이며, 인출장은 완성된 조판을 인출하는 장인을 말한다. 조판과 인출에 대한 일련의 작업은 교서관 관원의 감독하에 이루어지고, 인출본에 대한 교정은 별도로 지정한 문관이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 중앙에서 찍은 금속활자본은 엄격한 관리하에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자주 인본(印本)에 실수가 나오고 인쇄가 깨끗하지 못한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1543년(중종 28)에 편찬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는 인쇄에 따른 상벌 조항이 신설되었다. 즉 교서관에서 인쇄한 서책이 착오가 없을 경우에는 감인관(監印官)에게 상을 주고, 창준에게는 특별 근무일수를 쳐 주었다. 그러나 한 권마다 한글자가 틀릴 경우에는 감인관·감교관(監校官)·창준·수장·균자장은 30대의 태형(笞刑)에 처하고, 한 글자가 추가될 때마다 1등(等)의 벌을 가하였다. 인출장의 경우에는 한 권마다 한 글자가 진하거나 흐리면 30대의 태형에 처하고 한 글자당 1등의 벌을 추가하였다. 관원은 다섯 글자 이상이면 자격을 박탈하였고 창준 이하의 장인들은 죄를 준 다음에 50일의 근무일수를 삭감하였다. 그러나 1568년(명종 18)에는 이러한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100대의 장형(杖刑)에 처하는 것으로 적당히 조율하라는 명을 내렸다.

1573년(선조 6) 3월에 『내훈(內訓)』·『황화집(皇華集)』을 인출할 당시에 글자 획이 끊어지고 먹의 농담이 일정하지 않자 낱낱이 글자 수를 헤아리지 말고 흐린 글자를 참작하여 적용하라는 명을 내렸다[『선조실록』 6년 3월 17일]. 『미암일기』를 보면 다음 날인 3월 18일에 이로 인해 창준 31명이 두 달 동안 급료의 반을 삭감되었고, 수장과 인출장 및 균자장은 1개월 동안 급료의 반을 삭감되었는데, 수장이 직접 유희춘을 찾아와 하소연하므로 특별히 면제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수장을 비롯하여 교서관의 장인들은 교서관에 소속되어 책을 인출하는 일로 매우 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관서에서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상황이어서 교서관의 제조였던 유희춘은 이를 금지해 달라고 계청(啓請)하여 허락을 받아내기도 하였다[『선조실록』 6년 11월 1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 『미암일기(眉巖日記)』
■ 방효순, 「『芸閣冊都錄』을 통해본 校書館藏書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 배현숙, 「선조초 교서관활동과 서적유통고」, 『서지학연구』18, 1999.
■ 옥영정, 「조선시대 인쇄관청의 活字印刷 匠人 연구-均字匠을 중심으로」, 『한국문화』47 , 2007.
■ 장원연, 「조선시대 서책의 교정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42 , 2009.

■ [집필자] 김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