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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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별감(武藝別監)

서지사항
항목명무예별감(武藝別監)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무감(武監)
관련어거동(擧動), 궁궐(宮闕), 근장군(近仗軍), 금군(禁軍), 금례(禁隷), 금병(禁兵), 무예통장(武藝統長), 시위군(侍衛軍), 액속(掖屬), 행행(幸行), 협련군(挾輦軍), 협여군(挾輿軍), 호련대(扈輦隊), 호위무사(扈衛武士), 훈국(訓局), 훈련도감(訓鍊都監)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훈련도감 군병 중에서 무예가 출중한 자들을 선발하여 왕의 시위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게 한 정예군.

[개설]
무예별감(武藝別監)은 궁궐에서 왕이 거처하던 곳과 왕의 행행 시에 측근에서 호위를 담당하던 무사들이다. 무예청(武藝廳) 소속이었으며 무감(武監)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고종대까지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전각과 이동하는 각 문의 수비를 당당하였고, 왕이 외부로 행행할 때에는 측근에서 경호하던 정예 무사들이었다. 무예별감은 인조대에 훈련도감의 출신으로 무예청을 두면서 정식화되었다. 갑오개혁기에 신군제 개편과 함께 해체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선조는 임진왜란의 와중에 신변의 호위를 위해 무사들을 새로 보강했는데, 1595년(선조 28)에 숙위를 위해 용감하고 건장한 자를 선발하여 무용위(武勇衛)라 하였다. 인조대인 1637년(인조 15)에는 무용청(武勇廳)이란 이름을 내려 무예별감을 정식화하였다[『인조실록』 24년 7월 19일]. 이들은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늘 따라다녔다. 궁궐에 거처할 때는 숙위군, 궁궐 밖으로 행행할 때에는 협련군(挾輦軍)·협여군(挾輿軍)·호련대(扈輦隊)·근장군(近仗軍) 등의 시위군이었다. 또한 국왕의 측근 호위를 위해 창설된 만큼 왕권의 강화에도 자주 이용되었다. 예컨대 정조는 숙위에 무예별감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구선복(具善復) 등의 역모자들이 가장 주의하던 것이 무예별감이라고 할 정도였다[『정조실록』 11년 7월 2일]. 순조와 철종은 무예청의 무예별감을 늘리려 했으며, 헌종은 총위영(摠衛營)을 설치하면서 무예별감의 일부를 동원하고자 했다. 또한 인조가 사망했을 때에도 내관 나업(羅嶪)이 무예별감을 동원하여 빈전을 호위하였다[『인조실록』 27년 5월 8일]. 따라서 무예별감은 왕의 생시는 물론 사망 시에도 신변을 책임지던 최측근 경호 무사였다.

[조직 및 역할]
무예별감은 훈련도감의 정예병인 별기군(別技軍) 중에서 추천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임명하였다. 이들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총융청에 무예 교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무예별감이 소속된 무예청은 통장(統長) 2명의 지휘 하에 대령무예청(待令武藝廳) 46명, 가대령무예청(假待令武藝廳) 40명, 문무예청(門武藝廳武監) 87명으로 구성되었다. 대령무예청과 가대령무예청은 붉은 군복에 칼을 차고 시위하였다. 문무예청은 홍철릭(紅天翼)을 입고 황초립(黃草笠)을 썼으며 모자 위에 호수(虎鬚)를 달고 궁궐의 각 문에서 파수를 섰다. 특히 정조는 즉위 초부터 무예별감은 전좌(殿座)·동가(動駕)·능행·교행(郊行)을 따지지 말고, 철릭·초립(草笠)·구립(具笠)에다 호수를 사용하되 문을 지킬 때에는 두건과 철릭을 착용하도록 정식화했다. 따라서 무예별감은 왕의 호위군 중에서 옷차림만으로도 구별되었다. 동궐도(東闕圖)에는 무예청 청사(廳舍)가 있으며, 무예청 옆에 통장청(統長廳)이 있다. 통장이란 무예청 중 최고 지위의 무사이다. 무예별감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인원수가 증가하였는데, 인조 대에 40명이던 것이 영조대에는 100명이었다. 1861년(철종 12)에는 훈련도감의 마군과 보군 및 별기군에서 60명을 선발해서 충당하였다[『철종실록』 12년 11월 1일].

숙종대인 1691년(숙종 17)에는 무예별감의 출신을 훈련도감의 국출신청(局出身廳)에 전속(轉屬)시켰다. 이곳에는 과거 급제자만이 아니라 무예청에서 승진하면 전속되었다. 이들이 정조대에 장용위(壯勇衛)가 되었다[『정조실록』 9년 7월 2일].

[변천]
무예별감은 정조대에 왕의 친위군으로 재편되었다. 1785년(정조 9)에 정조는 『이진총방(肆陣總方)』을 만들어 별감 102인을 좌번·우번으로 나눈 뒤, 번(番)에는 각각 1총(總)과 5령(領)을 두고, 1령은 9인을 통솔하고, 1총은 5령을 통솔하는 새로운 호위 체계를 설립했다. 또한 무예청에 결원이 생기면 훈련도감에서 선발하던 것을 1785년(정조 9) 겨울부터 장용청의 군병으로 의망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왕들이 무예별감을 신뢰할수록 그들의 폐단도 증가하였다. 1649년(인조 27)에 무예별감 김흥선(金興善) 등은 무리를 지어 민가의 소를 훔쳐다 백악산에서 잡아먹고는 궁궐 내에 머물러 포도청에서 체포하지 못했다[『인조실록』 27년 4월 3일]. 1703년(숙종 29)에는 무예별감 임후필(林厚弼)이 연로에서 싸움을 하다가 말리던 대신(大臣)을 능욕했다가 귀양을 갔고[『숙종실록』 29년 4월 27일], 1811년(순조 11)에는 만취해 소동을 벌인 무예별감 안처의(安處誼) 등이 절도(絶島)에 형배되자 별감 90여 명이 궁궐 내에서 공소(控訴)한다며 장신(將臣)을 욕하였다[『순조실록』 11년 윤3월 16일]. 1846년(헌종 12)에는 합문과 궁궐 인근에서 무예별감들이 소동을 일으켜[『헌종실록』 12년 1월 14일] 관료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예별감에 대한 관료들의 비난은 대개 무예별감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을 견제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건은 별다른 처분 없이 넘어갔다.

개항기에도 무예별감은 왕실의 안전을 담당하였다. 예컨대 임오군란 때 무예별감 홍재의(洪在羲)가 명성황후를 궁궐 밖으로 피신시켜 충주의 민응식(閔應植) 고향집에 도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신군대와 순검 제도를 도입하면서 무예별감은 기존의 군영군들과 같이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훈국등록(訓局謄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만기요람(萬機要覽)』
■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경인문화사, 2012.
■ 김종수, 「17세기 訓鍊都監 軍制와 都監軍의 활동」, 『서울학연구』 2 , 1994.
■ 노영구, 「正祖代 五衛體制 復舊 시도와 華城 방어체제의 개편」, 『진단학보』 93 , 2002.

■ [집필자] 이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