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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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椒井)

서지사항
항목명초정(椒井)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초수(椒水)
관련어보사제(報謝祭), 산천제(山川祭), 온궁(溫宮), 온수(溫水), 온양(溫陽), 온정제(溫井祭), 온천(溫泉), 온행(溫幸), 욕초(浴椒), 인경궁(仁慶宮), 청주(淸州), 초수리(椒水里), 초자소(椒子所), 탕목(湯沐), 행행(幸行)
분야왕실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충청도 청주와 서울 인경궁(仁慶宮) 인근에서 나오던 냉천수인 초수(椒水)를 일컫는 말.

[개설]
초정(椒井)은 초수(椒水)가 나오는 곳으로, 우물처럼 냉천수(冷泉水)가 자연스럽게 용출되는 곳을 말한다. 온정(溫井)이 온천수가 용출되는 곳을 말하듯이 초정은 냉천수를 온천수와 같이 의료용으로 사용하였다. 초정은 서울과 청주 등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특히 그중 서울과 청주에 있던 곳을 말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부터 초정은 온천과 달리 차가운 물인데도 목욕이나 섭취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세종의 경우 온양온천에서 안질(眼疾) 치료에 실패한 뒤 새로운 온정 개발을 통해 질병을 고치려 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온천을 탐색하고 개발하게 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초정이다. 초정은 온천과 달리 병을 치료하려면 냉욕(冷浴)을 해야 했다. 초수는 후추[胡椒] 맛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종은 초정을 발견하자마자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월 27일]. 세종은 초정에 행궁을 지은 지 한 달 후에 왕비와 세자를 동반하고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행행하여 안질 치료에 효과를 보았다[『세종실록』 26년 2월 28일]. 이후 세조를 비롯해 왕실에서는 지속적으로 초정에 행행하였다[『세조실록』 10년 2월 21일]. 1606년(선조 39) 선조는 손가락의 질환을 초수에 담가서 고치려고 내의원(內醫院) 관원을 새벽에 보내어 물을 떠 오기까지 했다[『선조실록』 39년 5월 18일].

왕실에서는 청주 이외에 인경궁(仁慶宮) 인근의 초정도 사용하였다. 인경궁의 초정은 광해군이 인경궁을 세운 이후부터 사용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이 창건하였는데, 인조가 말년에 헐고 그 터를 비워 두었다. 효종 때에 숙명공주(淑明公主)가 청평위(靑平尉)와 혼인하자 효종이 그들의 살림집으로 인경궁 터에 저택을 지어 주었다. 인경궁은 원종(元宗)의 비 인헌왕후(仁獻王后)의 궁호(宮號)이면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사망한 궁궐이기도 하다[『영조실록』 45년 11월 19일].

효종대는 왕만이 아니라 왕비도 인경궁에 행행하여 초수로 목욕하였다[『효종실록』 5년 8월 17일][『효종실록』 7년 7월 21일]. 효종대 이후 현종도 인경궁의 초정을 애용하였다. 현종은 안포(眼胞)의 투침창(偸鍼瘡) 치료를 위해 초정에 가고자 했는데, 사실은 인경궁 초정 인근의 경치를 구경하려는 마음도 있었다[『현종실록』 2년 윤7월 17일]. 따라서 인경궁 초정은 치료만이 아니라 왕의 쉼터로도 이용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현종은 인경궁에 행행하여 초정에 목욕하는 것을 5일간이나 지속하였다[『현종실록』 2년 윤7월 2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온궁사실(溫宮事實)』
■ 『온행등록(溫幸謄錄)』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이숭녕, 「世宗의 轉地療養에 대하여―特히 溫泉과 冷泉의 療養을 中心으로 하여―」, 『어문연구』3권 제1·2호―一石 李熙昇先生 八旬紀念特大號, 1975.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 2006.

■ [집필자] 이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