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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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紅花)

서지사항
항목명홍화(紅花)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홍람화(紅藍花), 황람(黃藍)
분야생활 풍속
유형식재료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국화과의 일년생 초본식물의 꽃.

[개설]
국화과 잇꽃속 식물이다. ‘염색한다’는 의미의 아랍어 ‘korthom’에서 유래하였다. 잇꽃, 홍람화(紅藍花), 황람(黃藍)이라고도 한다. 말린 꽃잎을 우리면 붉은색이 우러나므로 조선시대에는 종이나 천, 식품에 물을 들이는 염료로 이용되었고, 어혈(瘀血)을 없애는 한방 약재로도 쓰였다.

[원산지 및 유통]
원산지는 이집트와 이란 인근인데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인도 등의 아시아, 남유럽,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분포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충청도, 함경도, 평안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사소절(士小節)」에 “선비의 아내는 생활이 곤궁하면 생업을 위해 길쌈하고 누에치는 일이 본업이지만, 닭과 오리를 치는 일, 장·초·술·기름 등을 판매하는 일, 과실을 잘 저장했다가 적기에 내다 파는 일, 홍화(紅花)·자초(紫草)·단목(丹木) 등을 사서 쌓아 두는 일은 부업으로 무방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서 홍화가 생필품이자 재화의 수단이 되는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화는 조선에서 국가 차원으로 관리하던 특용 작물이었다. 공물의 효율적인 징수를 위하여 개성부(開城府)에서는 홍화를 경작했는데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인순부(仁順府)·인수부(仁壽府)·도염서(都染署) 등 5개 관청의 관원을 보내 관리 감독을 하였다[『문종실록』 1년 11월 12일]. 세조는 각 도 관찰사에게 『농상집요(農桑輯要)』의 홍화 심는 법을 초록(抄錄)하여 보내고, 민간에 전달하여 2번 심는 이익을 알게 하도록 지시하였다[『세조실록』 8년 8월 7일].

홍화는 평안도 영변(寧邊), 희천(熙川), 양덕(陽德), 맹산(孟山)의 공물(貢物)로 기록되어 있다[『세조실록』 12년 5월 24일]. 공물로 들어온 홍화는 국내에서의 소비는 물론 명나라와의 교역물품이자 공물로 보내졌다[『성종실록』 18년 12월 13일][『성종실록』 18년 12월 14일].

홍화 진상에 대한 폐단은 세종대에도 나타났는데, 자색(紫色)으로 염색을 하기 위해 자초와 홍화 등의 과소비가 심해지자 사치를 막기 위해 자색의 염료는 진상하는 의대(衣襨)와 대궐 안에서 소용되는 외에는 일체 엄격히 금하고, 홍색으로 물들인 옷의 안감은 문무의 각 품관(品官)과 사대부의 자제로만 제한하였다[『세종실록』 9년 2월 19일]. 이후에도 영사(領事) 성희안(成希顔)과 안팽수(安彭壽)가 홍화를 진상(進上)하는 데 폐단이 많아 수령들의 횡포에 도망하는 백성이 많음을 보고하자 중종이 홍색(紅色) 금지령을 내렸다[『중종실록』 7년 2월 10일]. 지속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홍색 금지령의 효력은 미미하였다[『중종실록』 17년 9월 13일][『선조실록』 34년 10월 28일].

[연원 및 용도]
홍화는 4월에 주로 파종하고, 30~150㎝로 자라는데, 6~7월에 꽃이 피고, 7~8월에 열매가 달려 수확할 수 있다. 꽃의 생김새는 엉컹퀴와 유사하다. 노란색에 주홍색이 섞여 있는데 붉은색으로 변할 때 꽃잎을 수확한다. 꽃잎은 그늘에서 말려 염료와 약용으로 사용한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치농(治農)편」에 홍화는 “4~5월에 씨를 거두었다가 곧 늦홍화를 심는데, 8월이나 섣달에 모두 심을 수 있다. 7월에 꽃을 따야 빛깔이 선명하고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아, 봄에 심은 것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꽃이 피었을 때 청명한 날 새벽에 꽃잎을 따서 살짝 찧어 누런 즙은 빼 버리고 제비쑥[靑蒿]으로 덮어 하룻밤을 재운 다음 얇은 떡처럼 찍어 내어 말려 두었다가 사용하였다. 말린 홍화는 안료(顔料)로 가공하여 입술연지, 천, 종이, 식품의 염색용으로 사용하였다.

『음식디미방[飮食知未方]』의 세면법(細麵法)에는 녹두를 이용하여 면발이 가는 국수를 만들기 위해 녹말을 내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무명주머니에 간 녹두를 넣어 잇꽃[紅花] 물을 내듯 쳐 내고 찬물을 많이 부어 아주 눅눅하게 하여 두레박 모양의 질그릇에서 가라앉히라 하였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조지(鼎俎志)」에는 인삼당(人蔘糖)을 만들 때 발석당 가루가 엿과 같이 될 때 홍화의 누런 즙을 섞고 식혀 안쳐 길이 2~3촌(6~9㎝)으로 자르면 모양이 인삼과 비슷하고, 색이 호박색과 비슷하게 되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또한, 홍화씨를 절구에 찧어서 기름을 짠 홍람자유(紅藍子油)로 나물을 무쳐 먹으면 매우 부드럽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홍화씨를 씻어 물을 부어 물위에 뜬 것은 버리고, 씨를 갈아 물을 붓고 솥에서 끓여서 식초를 넣고 명주주머니에 부어 거르면 채소 음식에 잘 어울리는 홍화자방(紅花子方)이라 소개하였다.

『산림경제』
「치선(治膳)편」에는 잇물 만드는 법[造紅花]이 기록되어 있다. 물에 뜨는 홍화씨를 일어서 버리고, 절구에서 나른하게 찧어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이것을 다시 찧어 끓여 즙을 내어 식초를 넣고 냄비에 끓인다. 비단에 점점이 찍으면 마치 살코기와 같고, 흰 음식에 넣으면 빛이 극히 아름답다고 하였다. 홍화의 열매는 35~45% 지방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기름을 짤 수 있다. 홍화기름은 등잔불을 밝히는 등유(燈油)와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홍화는 간경(肝經)과 심경(心經)에 작용하여 약재로도 쓰였다. 혈액 순환을 촉진하고, 어혈을 없애는 효능이 있어 동맥경화증의 예방과 치료에 쓴다. 월경을 순조롭게 하고, 산후 조리를 위한 약재에 많이 쓰이나, 태아에게 유해하여 임신부에게는 쓰지 않는다.

선조 때 약방제조(藥房提調)는 중전(中殿)의 복통 증세에 술에 담갔다가 볶은 생건지황(生乾地黃) 1돈 중과, 술에 담갔다가 볶은 목단피(牧丹皮)·도인(桃仁)·홍화 각 5푼 중을 넣은 궁귀탕(芎歸湯)을 하루에 1차례씩 드시도록 하였고[『선조실록』 36년 5월 23일], 세자빈의 산후 어혈(瘀血)이 있을 때도 홍화가 들어간 탕약을 처방하였다.

홍화는 종묘제례 시 제기도감(祭器都監)에서 각종 제기와 의물(儀物)을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다[『선조실록』 34년 4월 17일].

[생활민속 관련사항]
혼인을 할 때 신부의 볼에 찍는 붉은색 연지의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옷에 붉은색을 염색할 때도 사용하였다. 『송와잡설(松窩雜說)』「조종」조에는 사대부(士大夫)의 옷인 토홍직령(土紅直領)은 대개 붉은 흙을 물에 담그고 아교를 타서 물들여서 만드는데, 말세(末世)에 와서는 천한 하리(下吏)들도 모두 홍화로 물을 들인다고 하였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설부(說部)」에는 홍화를 많이 심어서 붉은색은 물들이기가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월하게 여긴다고 하여 염색제로서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산림경제』「양화(養花)」편에는 모란 뿌리 밑에 백출(白朮)을 놓고 심으면 모든 꽃의 빛깔이 붉게 되는데, 흰 것은 홍화나 자초 즙을 짜 뿌리에 부어 주면 부어주는 빛깔에 따라 꽃빛이 변한다고 하여 당시 조선의 화훼 기술 발전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산림경제(山林經濟)』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와잡설(松窩雜說)』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음식디미방[飮食知未方]』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집필자] 차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