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찰밥이나 찰떡의 원료가 된다. 멥쌀이 반투명한 데 비해, 찹쌀은 유백색으로 불투명하고 찰기가 높으며 소화가 잘 된다. 밥이나 약식·찰편·인절미·단자 등의 떡류, 유과류, 식혜, 술, 식초, 고추장 등을 만드는 원료로 쓰인다. 찹쌀 또는 나미(糯米)라고도 한다.
[원산지 및 유통]
벼의 원산지는 중국의 운남(雲南) 지방에서부터 인도의 아삼 지방에 이르는 고원지대로 알려져 있다. 벼의 종류는 인디카(Indica)종과 자포니카(Japonica)종, 자바니카(Javanica)종으로 나뉜다.
조선시대에는 진상되는 공물 중의 하나였다. 세종대에 예조(禮曹)에서 문소전(文昭殿)·광효전(廣孝殿)·계성전(啓聖殿)·헌릉(獻陵)에 공상(供上)할 물품 중 예빈시(禮賓寺)의 관장 물품인 찹쌀[粘米]·밀가루[眞末]·팥[小豆]·송화(松花) 등을 봉상시(奉常寺)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세종실록』 6년 2월 28일].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봉상시에서 관장하는 공물 중 교점미(交粘米), 점미(粘米), 찹쌀가루[粘米末]가 있는데, 이 공물들은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에 기록된 기곡제(祈穀祭)에 올리는 제물(祭物)로 봉상시 제물단자(祭物單子)에도 있었다. 정조대에 호조가 사직(社稷) 기곡대제(祈穀大祭)에 쓸 제수(祭需)를 늘려 정한 별단(別單)에서 점미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분담하였다.
점미는 조선시대에 일본과 중국과의 교역품 중 하나였다. 세종대에 대마주태수(對馬州太守) 종정성(宗貞盛)과의 교역 품목 중 백점미(白粘米)가 있었고[『세종실록』 26년 윤7월 22일], 성종대에도 일본국통신사사목(日本國通信使事目) 중 점미 3석이 있었다[『성종실록』 8년 1월 8일].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도 대마도로 갈 때의 교역품에서 찾을 수 있다.
사은사(謝恩使)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북경에서 청의 공물 요구품 중 “이곳에는 선미(鮮米)가 극히 귀하니, 100석을 그대로 두되 70석은 점미로 대신 보내라.”고 전하였고[『인조실록』 25년 8월 13일], 동지겸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황인점(黃仁點), 부사(副使) 유의양(柳義養) 일행의 중국 사행 시 교역 물품이기도 했다[『정조실록』 8년 2월 17일]. 『만기요람』「재용편」에 기록된 세폐(歲幣)에도 점미가 있었다.
[연원 및 용도]
중국의 가장 오래된 자전 중 하나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벼를 찰기에 따라 구분하였다. 가장 찰기가 있는 것은 나(糯), 그다음 것은 갱(粳), 가장 찰기가 없는 것은 선(籼)으로 분류하고 있어 당시 찰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는 청동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솥이 만들어져 시루에 음식을 쪄서 먹을 수 있었다. 또 철기시대에는 쇠솥이 보급되어 오늘날과 같은 밥을 지을 수 있었다. 즉 삼국시대부터 솥을 이용하여 쌀을 찌고 밥을 짓는 것이 가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3대 유리왕이 왕위에 오를 때 떡을 깨물어 나타난 잇자국으로 치아의 수가 많은 사람을 왕으로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잇자국이 날 정도의 떡이라면 당시에 찹쌀로 만든 매끄러운 절편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신라 소지왕과 까마귀의 일화에서 약밥이 나온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찰밥을 아주 좋아했다. 『목은집(牧隱集)』에는 2월 초하룻날에 둘째아들 집에서 찰밥을 보내오자 읊은 시가 있다.
기름이 자르르한 찹쌀밥에 석밀을 섞고 / 粘米如脂石蜜和
다시 여기에 잣과 밤과 대추를 곁들여서 / 更敎松栗棗交加
천만 가호들이 이를 서로 받들어 보낼 제 / 千門萬戶擎相送
새벽빛 싸늘하고 까마귀는 날갯짓 하네 / 曙色蒼涼欲起鴉
『용재총화(慵齋叢話)』에 기록된 약밥을 짓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찹쌀[粘米]을 씻어 쪄서 밥을 지은 다음, 가늘게 자른 곶감[乾柹]과 익힌 밤·대추, 말린 고사리[乾蕨], 새발버섯[鳥足茸] 등의 재료에다가 꿀과 간장을 섞어서 다시 찐다. 잣[松子]과 호두[胡桃]를 드문드문 박으면 그 맛이 매우 달고 좋은데, 이것을 ‘약밥’이라 이른다. 오늘날의 약밥을 만드는 재료와는 다르다.
찹쌀로 밥을 할 때는 솥을 이용하는 것보다 찜기를 이용하여 찌는 것이 좋다. 솥에 서 가열할 경우 찹쌀의 전분질이 서로 결합하여 밑바닥 부분에 풀처럼 달라붙어 열의 흐름을 방해하여 솥의 아랫부분의 쌀은 타고 윗부분은 설익게 된다. 찔 때는 뜨거운 증기가 찹쌀 사이사이로 고루 스며들어 전체적으로 소화가 잘되도록 한다. 밥을 하는 중간에 찬물을 위에서 한두 번 뿌려 주면 더 잘된다. 다된 찰밥은 메밥에 비해 희고 불투명하며, 찰기가 많고, 쉽게 굳지 않는다.
찹쌀은 술 빚는 재료로도 사용하였다. 『종묘의궤(宗廟儀軌)』에는 종묘에 쓸 제주(祭酒)를 점미로 빚었다는 내용이 있고, 『산림경제(山林經濟)』「구황벽한(救荒辟寒)」조에도 삼해주(三亥酒)·송순주(松笋酒)·적선소주(謫仙燒酒) 주조법에 찹쌀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찰벼의 맛은 쓰고 달며, 성질은 순하고 독이 없다. 먹으면 속을 따뜻하게 한다. 술을 빚으면 덥고, 엿을 고면 더운 기가 많아지므로, 비장과 폐의 기운이 허하고 찬 사람에게 좋다고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지산집(芝山集)』에 기록된 단오 풍속을 보면, 오리[鶩]를 삶아 먹고, 줄[菰] 잎사귀로 찹쌀[粘米]을 싼 다음 이를 쪄서 찹쌀떡[粽]을 만들어 먹었다. 이 떡은 음양(陰陽)이 서로 감싸 안아 흩어지지 않는 것을 형상한 것인데, 이를 각서(角黍)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