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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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脯)

서지사항
항목명포(脯)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석(腊), 수(脩), 윤계(尹癸)
관련어건어포(乾魚脯), 건포(乾脯), 장록포(獐鹿脯), 정향포(丁香脯), 조포(條脯), 중포(中脯), 편포(片脯), 포석(脯腊), 포육(脯肉)
분야생활 풍속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소, 돼지, 노루, 사슴, 꿩, 생선 등을 납작하게 편을 만들어 햇볕에 말린 음식.

[개설]
조선시대에 포는 왕실과 민간을 막론하고 제례(祭禮)와 상례(喪禮)에서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르는 음식이며, 혼례(婚禮)에서도 단수포(腶脩脯)라 하여 신부가 시어머니께 처음으로 인사드릴 때 바치는 폐백음식으로 중요시되었다. 일상음식에서도 장기간 저장 가능한 어류 및 육류 식품으로서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포는 진상품과 하사품, 뇌물이나 선물 등으로 흔히 이용되었다.

『광재물보(廣才物譜)』에 따르면, ‘포(脯)’의 이명(異名) 또는 속명(俗名)은 ‘석(腊)’, ‘윤계(尹癸)’, ‘수(脩)’라 하였다. 그런데 『훈몽자회(訓蒙字會)』 식찬(食饌)의 내용을 보면, 석은 포 중에서도 뼈가 있는 것[有骨者]을 지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소로 만든 육포를 가장 귀하게 여겼고, 그다음으로 사슴이나 노루로 만든 포, 그다음은 꿩으로 만든 포를 쳤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왕실의 제사에 쓰는 정향포(丁香脯)를 비롯하여 건녹포(乾鹿脯)·건장포(乾獐脯)·건저포(乾猪脯)를 공물로 올렸다.

정향포를 마련하는 일은 특히 쉽지 않았던 듯한데, 이 때문에 태종 때에는 사간원(司諫院)에서 왕실에서 쓰는 정향포의 진상을 맡은 주(州)·군(郡)이 지나친 부담에 괴로워하니, 민간에서 쓰는 중포(中脯)의 예와 같이 하여 적당하게 수를 정하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태종실록』 12년 5월 19일]. 정향포의 부담이 계속되었는지, 3년 후인 1415년(태종 15)에 지금산군사(知錦山郡事) 송희경(宋希璟)이 공상(供上)할 정향포를 만들기 위해 아전들에게 사냥꾼과 함께 짐승을 잡도록 시켰으나, 아전들이 잡은 짐승을 바치지 않자 아전들을 곤장을 쳐서 때려죽인 일이 발생하였다[『태종실록』 15년 5월 17일].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사슴을 말린 녹포의 경우에는 경상도 경주부 밀양도호부, 진주목 김해도호부·함양군·산음현,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정선군·평창군, 원주목 영월군·홍천현, 회양도호부 김성현·김화현, 삼척도호부 평해군·울진현, 춘천도호부 낭천현·양구현·인제현의 토공(土貢)이고, 함길도 온성도호부의 토산(土産)이었다. 이 밖에 태조 때에는 제주에서 공물로 해마다 바치던 말고기[馬肉]로 만든 포를 그만두도록 한 일이 있어, 이 시기에 말고기로도 포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태조실록』 4년 7월 1일].

왕실에서 쓰는 포육(脯肉)은 공물로 받는 것 이외에 강무(講武) 때 잡은 노루와 사슴으로도 마련하였다[『세종실록』 7년 9월 10일]. 지방에서 직접 만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별사옹(別司饔)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하여 포육을 만들게 하기도 했다[『세종실록』 29년 9월 25일].

포는 나라 및 왕실의 제사에서 매우 중요한 제수였는데, 『국조오례의』「길례」 서례 찬실도설(饌實圖說)을 보면, 제수를 담는 변(籩)과 두(豆)의 숫자가 각각 12개에서 10개, 8개, 4개, 2개, 1개로 줄어들 때 담아야 할 음식이 나온다. 이때 변이 1개가 될 때까지 반드시 변에 담아 올리는 것이 녹포일 정도로, 포는 제사에서 핵심적인 음식으로 쓰였다.

제수로 쓰이는 것 외에 포는 선물로도 많이 쓰였다. 어포와 육포는 귀한 동물성 식품임에도 불구하고, 날것에 비하면 저장 기간이 길고 부피가 작고 가볍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 사신과 같이 오랜 여정을 거쳐야 하는 외국 손님에게 알맞은 선물이었다.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하기도 하였지만[『세조실록』 5년 4월 10일], 병중에 있어 보양이 필요한 사람이나 나이든 노인들에게도 선물로 적합하였다. 단종은 병이 든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와 황보인(皇甫仁)을 위해서 포를 내려 주었고[『단종실록』 즉위 8월 2일 3번째기사][『단종실록』 1년 6월 30일], 성종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양로연(養老宴)을 베푼 후 부채와 함께 포육[脯脩]을 내려 주었다[『성종실록』 7년 9월 12일]. 이가 약한 노약자는 이렇게 받은 포를 그대로 씹어 먹을 수가 없었으므로, 포를 가루 내어 국에 타서 먹기도 했다.

[변천]
변(邊)에 담아 올리는 포의 규격에 관해 세종 때에 논의가 있었다. 예조(禮曹)에서는 『의례(儀禮)』「향음주례(鄕飮酒禮)」에 길이가 1척 2촌임을 상고하여 포의 길이를 정하고, 너비와 두께도 예기척(禮器尺)으로 너비는 2촌, 두께는 3푼으로 정하자고 아뢰었고, 이를 따르기로 하였다[『세종실록』 즉위 12월 19일 4번째기사]. 이러한 포의 규격이 정확히 지켜진 것은 아니었고, 효종과 숙종대에 포의 규격이 조정되었다.

정조대에 이르면, 왕이 변에 담는 12가지 제물 가운데 포의 규격이 가장 예에 어긋난다고 우려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포의 길이가 예기척으로 1척 3촌, 너비가 3촌 반, 두께가 1치 3푼이나 되어서, 포를 진설할 때면 변을 두세 개씩 더 사용해야 했다. 게다가 『의례』에서 말한 포의 길이 1척 2촌은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예기척으로는 8척에 해당하는데도 예기척으로 1척 3촌 길이의 포를 쓰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제향에 쓰는 포의 규격을 새롭게 제정하고, 이를 호조(戶曹)에서 놋쇠로 표준을 만들어 반포하고, 봉상시(奉常寺)와 종묘·사직·성균관의 제사를 맡은 곳에서도 이 표준을 제고(祭庫)에 간수하고 있다가 제사 때 실제로 재어서 치수가 차이나지 않도록 규격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였다[『정조실록』 17년 8월 18일].

제향에 주로 쓰는 중포(中脯)를 보면, 규격을 지켜 만들기는커녕 재료와 위생이 큰 문제가 있었다. 중포는 고기를 잘게 다진 뒤 다시 합쳐서 두들겨 편(片)을 만들기 때문에, 여름에는 구더기가 생겼고 사람이 먹지 않는 고기를 섞어서 만든 포도 많았다. 이렇듯 불결한데도 이 방법대로 계속 만든 이유는 완성된 포가 견고하고 오래가기 때문이었다. 이에 보다 정결한 제수로 쓰고자, 각 고을에서 바치는 중포를 같은 무게의 조포(條脯)로 대신하기로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6년 6월 18일][『광해군일기(중초본)』 6년 7월 3일]. 인조 때에는 다시 중포를 받을 때 길이·너비·두께에서 정해진 규격을 지키고, 포의 겉에 고을 이름을 새겨서 납품하도록 명하였다[『인조실록』 23년 10월 25일].

[참고문헌]
■ 『광재물보(廣才物譜)』
■ 『물보(物譜)』

■ [집필자] 김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