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여장은 성첩(城堞) 혹은 성가퀴, 살받이라고도 한다. 성벽의 몸체가 되는 성, 즉 체성(體城)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아군의 신체를 보호하고 또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물이다. 체성 위의 여장에 군병들이 몸을 숨겨 생존력을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수성(守城)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여장은 대체로 작은 돌이나 흙을 빚어 구운 벽돌로 쌓았으므로 체성에 비해 훼손되기 쉬웠다. 그렇기 때문에 성을 수리할 때는 여장을 수리하는 것이 핵심적인 사항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체성 위에 작은 담을 쌓았는데, 경우에 따라 관측용 구멍을 두기도 했으나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여장을 단장(短墻)이라고도 불렀으며, 적을 공격하고 관측하기 위하여 궁가(弓家)라는 별도의 시설물을 여러 개의 여장 사이에 배치하였다[『태종실록』 10년 3월 30일]. 또 체성 위에 여장을 쌓는 동시에 치(雉, [敵臺])를 쌓아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세종실록』 19년 8월 20일].
현재 확인되는 성곽 시설의 여장에는 화기를 사용하여 적을 공격하거나 그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뚫은 총안(銃眼)이라는 구멍과 각 여장 사이에 만든 타구(垜口)라는 작은 공간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임진왜란 이후 조총(鳥銃)이 도입되어 화기의 사용이 일반화된 이후에 정착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여장 사이에 타구를 뚫고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내었는데 이는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선조실록』 26년 6월 13일]. 임진왜란 이후에는 여진족의 흥기에 대응하여 평야에서의 전법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인식됨에 따라 청야수성(淸野守城)이 강조되었다. 청야수성 전술은 적의 침입이 있을 때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모두 성안으로 들이고, 들을 비워서 보급을 차단하는 병법이었다. 이때 성곽은 화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로 개축되었고 여장의 제도는 정비되어 나갔다.
조선후기에는 산성(山城)이 중시되기 시작하면서 지형에 따른 축성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축성되거나 개축된 성곽은 높은 바위나 절벽을 끼고 있을 경우, 체성을 쌓지 않고 여장만을 두기도 했다. 여장은 성을 지키는 군병이 실제로 전투를 벌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장의 개수는 성에 배치할 군사의 수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축성과 개축에 있어 여장의 규모와 수량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여장의 수에 따라 성곽에 배치할 군사의 수가 증감되었기 때문이다.
[형태]
여장은 형태에 따라 평(平)여장, 철(凸) 자형의 여장, 반원형(半圓形)의 여장 등으로 구분된다. 높이는 보통 성인의 키보다 조금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문종대에 전라도 성곽의 현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2~3자(약 0.6~0.9m)였다[『문종실록』 1년 8월 21일]. 여장은 체성에 비해 너비가 좁고, 그 안에는 병사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내었다[『성종실록』 6년 4월 17일]. 또 여장 위에는 지붕과 같은 옥개(屋蓋)를 두어 적이 쉽게 성벽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여장의 재료는 주로 흙을 구운 전돌이나 크기가 작은 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