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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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원(董一元)

서지사항
항목명동일원(董一元)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도진의홍(島津義弘), 신채(新寨), 정유재란(丁酉再亂), 팽신고(彭信古)
분야정치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무장.

[개설]
동일원(董一元)은 명나라의 장군이다. 하북(河北) 선부전위(宣府前衛) 사람으로 용맹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다. 가정 연간 계진(薊鎭)의 유격(遊擊)으로 토만(土蠻)과 흑석탄(黑石炭)을 토벌한 공으로 참장(參將)이 되었다. 이후 청해(靑海), 연수(延綏) 일대 변경에서 이민족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총병관(總兵官)으로 승진했다. 1594년 토아부(兎兒部)를 격파하여 좌도독(左都督)이 되었고 태자태보(太子太保)의 직위가 더해졌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어왜총병관(禦倭總兵官)이 되어 총독 형개(邢玠)의 지휘 아래 조선으로 왔다. 1598년 10월 진주에 진입하였으나 도진의홍(島津義弘)이 건설한 사천의 신채(新寨) 진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했다. 이 일로 태자태보의 직위를 삭탈당하였고 관품은 3등이 강등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공을 세워 예전의 관품을 회복하고 은폐를 하사받았다.

[가계]
부친은 동양(董暘)이다. 가정 연간 선부(宣府)에서 유격을 지냈으나 몽골 알탄(Altan) 칸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형 동일규(董一奎)는 도독첨사(都督僉事)를 지냈으며 산서(山西), 연수, 영하(寧夏)의 변경에서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일원의 둘째 아들 동대순(董大順)은 조선으로 귀화하여 광천동씨(廣川董氏)의 일파를 이루었다.

[활동 사항]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조는 총독 형개의 통제 아래 동일원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1598년 동일원은 어왜총병관이 되었다. 당시 동일원이 이끄는 군대는 사천에서 도진의홍을 방어하였는데 먼저 진주를 취하고 망진(望晉)을 점령하였다[『선조실록』 31년 9월 25일]. 그리고 이 승세를 타고 곤양(昆陽)을 함락시켰다. 일본군이 사천의 본영으로 물러나자 다시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계속 전진하여 신채 진지를 위협했다. 신채는 삼면이 강에 접하였고 한 쪽은 육지로 연결되어 해수를 끌어 해자를 삼았는데 신채 아래 해선 수천이 정박하고 있었고 양측에 성채를 수축하여 좌우의 병풍으로 삼았다.

동일원은 보병과 기병으로 나누어 협공하였다. 공격 초 보병 유격 팽신고(彭信古)는 신채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일본군의 해자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여 성문을 부수었는데 갑자기 팽신고의 군중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 화염이 충천했다. 일본군이 이 기회를 타고 공격해 들어오고 또한 일본군의 원군이 도착하자 명군은 혼란에 빠졌다. 명의 기병을 이끌던 유격 마정문(馬呈文), 학삼빙(郝三聘)이 먼저 달아나고 동일원도 진주로 퇴각하였다[『선조실록』 31년 10월 17일].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만력제는 마정문과 학삼빙을 참하고 팽신고 등의 관직을 강등하였다. 동일원도 태보직을 삭탈당하고 3급의 관계가 강등되었다. 마침 풍신수길이 죽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 동일원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본래의 관급을 회복하였다.

[참고문헌]
■ 『국각(國榷)』
■ 『명사(明史)』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吳如蒿, 『中華軍事人物大辭典』, 新華出版社, 1989.

■ [집필자] 한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