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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1571년 진사가 되었고 이후 밀운지현이 되었다. 어사, 순무를 역임하고 남경병부시랑으로 승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병부상서겸계요총독(兵部尙書兼薊遼總督)으로 임명받아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가계]
[활동 사항]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 조정에서는 병부 상서 형개를 총독(總督)으로 삼고,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양호(楊鎬)를 경리(經理)로 임명하여 다시 조선을 구원할 명군을 이끌게 하였다. 그 휘하에는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 선대병(宣大兵) 1천을 통솔하게 하고,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은 요동병(遼東兵) 3천을 거느리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을 거느리고, 유격(遊擊) 우백영(牛伯英)은 밀운병(密雲兵) 2천을 거느리고, 유격(遊擊) 진우충(陳愚衷)은 연수병(延綬兵) 2천을 거느렸다.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은 감찰을, 호부(戶部) 낭중(郞中) 동한유(董漢儒)가 군량을 감독하게 했다[『선조수정실록』 30년 2월 1일]. 형개의 직함은 흠차총독계요보정등처군무(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 경략어왜겸리양향(經略禦倭兼理糧餉) 병부상서겸도찰원우부도어사(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였다. 1597년 10월에 조선에 왔다가 1598년 3월에 돌아갔으며 7월에 다시 와서 한성에 머물렀다가 1599년 5월에 돌아갔다.
형개는 조선의 군사가 수전에만 익숙하니 사천(四川)·절강(浙江)의 병사를 모집하고 아울러 계주(薊州)·요양(遼陽)·선부(宣府)·대동(大同)·산서(山西)·섬서(陝西)의 보병 및 복건(福建)·오칙(吳勅)의 수군을 정비해두고 유정(劉綎)에게는 사천 병사 및 한병(漢兵)을 통솔해 공격 명령을 기다리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유재란이 시작되고 1597년 8월 남원성에서 일본군에 패한 직후 형개는 조선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남원이 함락된 이후 조선 관민이 모두 도망간 사실과 명군을 제대로 돕거나 군량을 지원하지 않는 점 등을 거론하면서 일본을 막는 것보다 조선 내부의 적을 제어하는 것이 어렵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군사 관련 업무에 대해서는 양호의 의견에 따랐다. 양호가 정응태(丁應泰)의 참소 때문에 직무에서 물러나게 되자 조선에 들어와 업무를 대신하였다[『선조실록』 31년 8월 24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간 후인 1599년 5월, 10개 조의 내용으로 동정선후사의(東征善後事宜)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그는 종전을 맞아 조선에 남겨둘 지휘관의 명단, 명군 병력의 수, 군량 조달 방법, 조선의 방어지역 선정, 조선군 조련 문제 등을 언급한 것이다. 그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에 순포(巡捕)를 증원해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순포란 도적을 잡는 순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쟁 직후 도적이 창궐하는 등 혼란한 상황에서 명군이 조선의 내정 영역에 속하는 치안 문제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저술 및 작품]
『동정주의(東征奏議)』, 『숭검록(崇儉錄)』, 『경략어왜주의(經略禦倭奏議)』
[상훈 및 추모]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당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도왔다 하여 명의 병부 상서 형개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를 태평관 서쪽에 건립하였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번째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냈다. 창건 당시 선조의 어필인 ‘재조번방(再造藩邦)’의 현판을 걸었으며[『선조실록』 32년 10월 5일] 1746년 영조의 어필로 ‘수은해동(垂恩海東)’의 현판을 써서 걸게 하였다. 선무사는 명나라 사람과 이순신의 자손을 임명해 관리하도록 했다[『영조실록』 22년 윤3월 14일].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張撝之,沈起煒,劉德重 主編, 『中國歷代人名大辭典』上·下, 上海古籍出版社, 1999.
■ 한명기, 「임진왜란 시기 명군지휘부의 조선에 대한 요구와 간섭」, 『한국학연구』36,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