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군의 출병(出兵)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더욱이 출병에 조선과 일본이 연루되어 있다는 정보가 지속적으로 보고되자 명에서는 조선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명에서는 조선의 구원 요청을 받고 나서도 의심을 풀지 못했다. 당시 명에서 조선의 의도와 조·일 간의 연루설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했던 관리 중 한 명이 바로 황응양이었다. 이후 황응양은 명군에서 참모(參謀) 역할을 수행했다. 황응양은 척계광(戚繼光)의 휘하에서 참모직을 수행하면서 전공을 세운 경험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맡고 있던 관직은 지휘(指揮)였다.
[활동 사항]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살고 있던 허의후(許義後)란 인물이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명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절강성(浙江省)에 제공했었다. 또한 그는 일본과 조선이 연루되어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주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4년 5월 1일]. 그 결과 명은 조선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선은 외교적으로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구원을 요청했을 때도 명 조정에서는 출병 여부를 두고 의견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조선에 구원군을 보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따라 석성은 황응양을 파견해 조선의 의도와 전쟁 상황을 파악하도록 조치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황응양은 당시 서일관(徐一貫)·하시(夏時) 등과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항주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황응양은 조선 신료들의 적극적인 해명과 일본이 보낸 문서 등을 확인한 뒤 의심을 완전히 풀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해 병부 상서 석성에게 사실을 보고한 뒤 신속하게 명군을 파병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조선 조정에 약속했다[『선조실록』 25년 7월 1일] [『선조실록』 25년 7월 1일] [『선조실록』 25년 7월 1일].
황응양은 강화(江華)에 있을 때 사형을 면한다는 증명서인 면사첩(免死帖)을 가져와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다. 선조는 황응양이 의기와 절조가 있어 주는 물건이 있더라도 절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의 관리 중 가장 훌륭하다고 극찬했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