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그런데 고종이 승하한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에 그의 인산(因山)은 조선의 왕과도 대한제국의 황제와도 달랐다.
효덕전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혼전이다. 고종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閔氏)이다. 1919년 그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효덕(孝德)’으로 정하고[『순종실록부록』 12년 1월 27일(양력) 7번째기사], 3개월 뒤 금곡(金谷)에 있는 홍릉(洪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8실에 부묘할 때까지 효덕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였고, 빈전(殯殿)과 혼전 역시 함녕전에 마련하였다[『순종실록부록』 12년 1월 22일]. 3개월 뒤인 3월에 홍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순종실록부록』 12년 3월 5일]. 이때 덕수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효덕전이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효덕전은 고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효덕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반우한 뒤 재우제(再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효덕전에서 지냈다. 초우제(初虞祭)는 산릉에서 지냈다. 이듬해 1920년 1월 22일 일년제(一年祭)를, 1921년 1월 28일 상제(祥祭)를, 1921년 3월 19일 담제(禫祭)를 효덕전에서 거행하였다.
1921년 3월 31일 고종의 신주를 효덕전에서 모셔 와 태묘에 부묘하였다. 이때 경효전(景孝殿)에 봉안하였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신주도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효덕전은 고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919년 3월 5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921년 3월 31일까지 덕수궁의 함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효덕전이 있었던 덕수궁의 함녕전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