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효원전(孝元殿)은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혼전이다. 정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이다. 1800년(정조 24) 정조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효원(孝元)’으로 정하고[『순조실록』 즉위년 7월 13일], 6개월 뒤 건릉(健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5실에 부묘할 때까지 효원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자 환경전(歡慶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6개월 뒤인 11월에 건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순조실록』 즉위년 11월 7일]. 이때 창덕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효원전이다.
효원전이라는 전호는 처음에 효녕전(孝寧殿)으로 정했다가 ‘효녕’이 숙종의 혼전 전호와 서로 비슷하다는 이유로 ‘효원전’으로 고쳤다. 효원전은 처음에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으로 정했다가 다시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으로 정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효원전은 정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효원전에서는 반우한 뒤 삼우제(三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초우제(初虞祭)는 화성 행궁 주정소(晝停所)에서, 재우제(再虞祭)는 시흥 행궁에서 지냈다.
1802년(순조 2) 8월 9일 정조의 신주를 효원전에서 모셔 와 태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효원전은 정조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800년 11월 7일부터 삼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802년 8월 9일까지 창덕궁의 선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효원전이 있었던 창덕궁의 선정전은 이후 순조, 헌종, 철종의 혼전으로 계속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