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계주는 연경(燕京: 현 북경)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예로부터 조선의 사신들이 연경으로 가는 길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신이 남긴 연행록(燕行錄) 등의 기록에 그 이름이 남아 있었다. 특히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계주를 둘러본 느낌이 기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당나라 때 이 지역에 지어진 독락사(獨樂寺)라는 절이 유명하였다.
[형성 및 변천]
730년(개원 18) 당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다. 요나라 때에는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에 소속되어 어양현(漁陽縣)·삼하현(三河縣)·옥전현(玉田縣) 3현을 관할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그 범위가 서쪽으로 조금 축소되었다. 명나라 홍무제 초기에도 어양현을 중심으로 계주를 설치하고 관청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동남쪽의 옥전현과 풍윤현(豊潤縣), 그리고 동쪽의 준화현(遵化縣)과 서북쪽의 평곡현(平谷縣)을 관할하였다. 계속 유지되다가 1913년 계현(薊縣)으로 바뀌었다.
『명사(明史)』에서는 ‘계주의 서북쪽에는 반산(盘山)이 있고 동북쪽에는 공동산(崆峒山)이 있다. 또한 구수(泃水)가 북쪽에 있고 고하(沽河)가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계주는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다.’고 하였으며, ‘반산에는 기이한 절경이 많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