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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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주(薊州)

서지사항
항목명계주(薊州)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독락사(獨樂寺), 사행로(使行路), 연경(燕京), 연행록(燕行錄), 『열하일기(熱河日記)』
분야정치
유형지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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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 천진의 한 도시로, 명·청 시기 조선 사신단의 사행로에 있었음.

[개설]
계주는 연경(燕京: 현 북경)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예로부터 조선의 사신들이 연경으로 가는 길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신이 남긴 연행록(燕行錄) 등의 기록에 그 이름이 남아 있었다. 특히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계주를 둘러본 느낌이 기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당나라 때 이 지역에 지어진 독락사(獨樂寺)라는 절이 유명하였다.

[형성 및 변천]
730년(개원 18) 당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다. 요나라 때에는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에 소속되어 어양현(漁陽縣)·삼하현(三河縣)·옥전현(玉田縣) 3현을 관할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그 범위가 서쪽으로 조금 축소되었다. 명나라 홍무제 초기에도 어양현을 중심으로 계주를 설치하고 관청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동남쪽의 옥전현과 풍윤현(豊潤縣), 그리고 동쪽의 준화현(遵化縣)과 서북쪽의 평곡현(平谷縣)을 관할하였다. 계속 유지되다가 1913년 계현(薊縣)으로 바뀌었다.

[위치 비정]
현재 중국 천진직할시(天津直轄市) 계현(薊縣).

[관련 기록]
계주는 북경 옆에 위치하여 요동과 통하는 요지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에 계주에 군사를 집결시켜 요동의 군사와 함께 조선에 지원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25년 9월 6일]. 또한 조선에서 보낸 사신들이 북경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 머무는 경유지였다[『현종실록』 8년 2월 15일][『순조실록』 14년 2월 25일].

『명사(明史)』에서는 ‘계주의 서북쪽에는 반산(盘山)이 있고 동북쪽에는 공동산(崆峒山)이 있다. 또한 구수(泃水)가 북쪽에 있고 고하(沽河)가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계주는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다.’고 하였으며, ‘반산에는 기이한 절경이 많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열하일기(熱河日記)』
■ 『명사(明史)』
■ 『요사(遼史)』

■ [집필자] 남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