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요동 지역에 있었던 명의 역참으로 조선 사행단이 육로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 간 곳.
[개설]
조선시대에 대중국 사행은 요동(遼東)과 요서 지역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대체로 육로를 통하여 북경으로 이동하였다. 다만 해당 지역의 정세가 불안정하거나 전란 등이 있을 때에는 해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육로로 이동할 때 조선의 사행단은 요양(遼陽)으로부터 안산(鞍山)-해주(海州)-우가장(牛家莊)-사령(沙嶺)-고평(高平)-반산(盤山)-광녕(廣寧)-여양(閭陽)-십삼산(十三山)-소릉하(小凌河)-행산(杏山)-연산(連山)-조장(曹莊)-동관(東關)-사하(沙河)-고령(高嶺)을 거쳐 산해관에 이르렀다. 산해관부터는 심하역(深河驛)-무녕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역(七家領驛)-풍윤역(豊潤驛)-옥전현(玉田縣)-소주(蘇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를 지나서 북경에 도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우가장은 사행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지만, 조선 사행단이 선호하는 숙박지는 아니었다. 숙박 시설이 초가집으로 되어 있는 데다 공간이 매우 협소하였다. 또한 주변의 지리 환경 역시 좋지 않았으며, 우가장 일대의 중국 관리들은 불친절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물물의 상태가 너무 나빠서 조선 사행단은 물을 마시기 힘들 정도였고, 먼지로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돼지똥과 말똥이 범벅인 채로 사신단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1679년 청은 해안 지역 방어를 위하여 우가장에 성보(城堡)를 설치하고 통로를 막아 버리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사행단은 백기보(白旗堡)에서 소흑산(小黑山)을 돌아 광녕에 이르러 명대 이전에 이용하였던 길을 따라 북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의 조치로 이후부터는 조선의 대중국 사행로에서 우가장이 제외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677년까지 조선 사신이 우가장을 통행하였던 기록이 확인된다[『숙종실록』 3년 1월 28일].
[참고문헌]
■ 『명사고(明史稿)』
■ 『명통감(明通鑑)』
■ 『명사(明史)』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 『요동지(遼東志)』
■ 『전요지(全遼志)』
■ 『조천기(朝天記)』
■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 『통문관지(通文館志)』
■ 『연원직지(燕轅直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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