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문정왕후처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문덕전은 중종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의 혼전이다. 문정왕후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다. 1565(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 명을 ‘문덕(文德)’으로 정하고[『명종실록』 20년 4월 12일], 4개월 뒤 태릉(泰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중종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문덕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65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였다. 『명종실록』에는 시신을 봉안하는 빈전(殯殿)은 어디에 마련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4개월 뒤인 7월에 태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해 둔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명종실록』 20년 7월 15일]. 이때 조성한 혼전 명이 문덕전이다.
문덕전을 어디에 설치했는가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다른 경우가 많이 확인되어 문덕전의 위치를 창덕궁이라고 쉽게 단정 짓기 어렵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문덕전은 문정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문덕전에서는 초우제(初虞祭),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1567년(명종 22) 6월 12일 문정왕후의 신주를 문덕전에서 받들어 내어 태묘에 부묘하고 부묘제를 지냈다. 따라서 문덕전은 문정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65년 7월 15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567년 6월 12일까지 존재하였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문덕전이 마련된 전각을 알 수 없지만 『증보문헌비고』의 기록대로 창덕궁 안에 있었다면 창덕궁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궁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