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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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환(袁崇煥)

서지사항
항목명원숭환(袁崇煥)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금주(錦州), 누르하치[奴爾哈赤], 모문룡(毛文龍), 영금대첩(寧錦大捷), 영원성(寧遠城), 요동(遼東), 홍이포(紅夷砲), 후금(後金)
분야정치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명나라 후기 후금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장수.

[개설]
명나라 말기 후금(後金)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던 명나라 후기의 명장이다. 1622년 자청하여 요동의 수비를 담당하였으나 청 태종의 이간과 명나라 말기의 정쟁에 휩싸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가계]
[활동 사항]
1619년 35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복건성(福建省) 소무(邵武)의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는 양호(楊昊) 휘하에 있던 요동의 명 군대가 누르하치[奴爾哈赤]의 후금에 대패하고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잃은 해였다. 이를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한다. 누르하치는 여세를 몰아쳐 2년 뒤 1621년에는 심양(沈陽)과 요양(遼陽)을 점령했다.

1621년의 패배로 명나라는 요하(遼河)에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났고, 1622년에는 광녕(廣寧)에 있던 왕화정(王化貞)이 패배하여 명은 여진족에게 요동 지역 전체를 내어주고 산해관(山海關)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북경(北京)에 있던 원숭환은 홀로 전투 지역으로 정찰을 나갔다 돌아와서 만약 필요한 병력과 자금이 제공된다면 요동의 안전을 회복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는 전쟁의 부관(副官)으로 임명되었다가 즉시 능력을 인정받아 지휘관으로 승진되었고, 병력 모집을 위한 자금을 공급받았다. 그는 산해관으로 가서 군대를 지휘했다. 산해관의 북쪽 지역은 명의 철수 이후 카라친([喀喇沁], Kalaqin) 몽골이 점령하고 있었다.

7월에 영원성(寧遠城), 금주(錦州)까지 1차 방어선을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 3년 동안 원숭환과 그의 상관인 손승종은 만계(滿桂)의 도움으로 함께 어울려 요동 회복을 위해 성보 수축 등 많은 일을 했다. 당시에 요동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꾸준히 경계를 확장해 나갔고, 1623년에 영원성을 중심으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1623년 9월 손승종은 영원을 최후까지 지키기로 결정하고 1624년 영원성의 수축을 끝냈다. 1625년 손승종과 원숭환은 금주, 송산(松山), 행산(杏山), 소릉하(小凌河) 등지로 진출하여 성보를 수축하면서 영원을 방어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1625년 11월 6일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환관 위충현(魏忠賢)과 대립하고 있던 손승종은 위충현에게 밀려 파면되고 말았다. 손승종이 파면된 이후 새로 부임한 고제(高第)는 영원으로 들어오는 외곽의 성보와 방어선을 포기하고 모든 병력을 영원에 집중하라고 명하였다. 원숭환은 영원성에 남기 위해 단호히 고제의 명령을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1626년 대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요하를 건너 영원으로 모든 병력을 집중시켰다. 고제는 산해관의 병력으로 병력이 부족한 영원을 지원하지 않아서 원숭환은 영원의 병력만으로 누르하치와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야 했다.

원숭환은 새롭게 설치한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바탕으로 필사적으로 싸워 영원성을 방어하는 데 힘겹게 성공하였다. 1626년 2월 조정에서는 이 승리를 계기로 산해관 밖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는 총지휘권을 원숭환에게 주었다. 누르하치는 이 싸움에서의 부상으로 8월에 병사하였다.

원숭환은 누르하치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1626년 9월에 누르하치를 대신한 아바하이([阿巴亥], Abahai)와 휴전에 대해 협상하였다. 아바하이는 원숭환의 주의를 모문룡(毛文龍)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조선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1627년 6월에 후금은 금주를 공략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금주 공략에 실패한 이후 그들은 7월 영원성을 다시 공격하였고 만계·조대수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명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것을 역사에서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고 하며 원숭환의 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628년, 사종(思宗)의 즉위와 함께 원숭환은 병부 상서 및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가 되며, 다시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9월에 다시 전선에 도착한 원숭환은 금주·영원성·산해관 세 곳에 각각 진을 치고, 요동 수복을 5년 안에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629년, 그는 황제로부터 요동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그의 권력이 정점에 이르자, 그는 몇몇 사람들에 의한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해 6월, 원숭환은 영원위(寧遠衛)에서 모문룡을 만나고 모문룡이 돌아가는 길에 전별연을 열어 그를 접대하다가 갑자기 황제의 명령서와 화살을 소매 속에서 꺼내 보이고는 좌우에 명해 모문룡을 끌고 나가 목을 베었다[『인조실록』 7년 6월 30일].

그 동안 후금은 요동 지역을 피해 몽골을 경유하여 중국을 침략할 준비를 하였고, 1629년 겨울에 갑작스럽게 북경 근처에 나타났다. 원숭환은 영원성에서 북경을 지키기 위해 급히 돌아갔으나, 1630년 1월 13일에 황제를 알현하다가 체포되었다. 비록 후금이 장성을 넘어 들어오도록 한 책임이 원숭환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환관 위충현 세력은 원숭환이 이전에 휴전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구실로 적과 내통했다고 비난하였다[『인조실록』 8년 7월 18일]. 이러한 비난과 모문룡을 죽였다는 혐의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아 거리에서 능지형(凌遅刑)을 당했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만리장성 밖 후금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의 마지막 희망은 사라져버린 셈이다.

[상훈 및 추모]
청 말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원숭환을 ‘중국의 가장 위대한 군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樊樹志, 『晩明史』, 復旦大學出版社, 2003.
■ 孫文良·李治亭, 『明淸戰爭史略』, 江蘇敎育出版社, 2005.
■ 閻崇年, 『明亡興淸六十年』, 中華書局, 2008.

■ [집필자] 남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