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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덕궁·창경궁에 있던 숙종의 첫 번째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
[개설]
혼전(魂殿)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인경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영소전은 숙종의 첫 번째 비 인경왕후의 혼전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1680년(숙종 6)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소(永昭)’로 정하고[『숙종실록』 6년 11월 2일], 5개월 뒤 익릉(翼陵)에 장례를 치렀다. 이후부터 1720년(숙종 46) 숙종이 승하하고 3년상을 치를 때까지 영소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80년(숙종 6) 10월 26일 인경왕후가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자 융복전(隆福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인 1681년(숙종 7) 2월에 익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그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숙종실록』 7년 2월 22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영소전이다.
영소전은 처음에 경덕궁 계상전(啓祥殿)에 마련하였다. 반우하고 신주를 봉안한 곳이 계상전이었다. 그 뒤 숙종이 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영소전을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1701년(숙종 27)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고 그녀의 혼전인 경녕전(敬寧殿)을 문정전에 마련하기 위해 영소전을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 임시로 봉안하였다[『숙종실록』 27년 10월 28일]. 1701년(숙종 27) 12월 15일에 인현왕후의 사우제(四虞祭)를 지내고, 이틀 뒤인 12월 17일에 영소전을 다시 창경궁의 문정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숙종실록』 27년 12월 17일]. 혼전의 전각이 바뀌더라도 혼전명은 그대로 영소전이라 일컬었다.
조선후기의 기록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덕궁(현 경희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영소전은 인경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영소전에서 거행한 의식으로 우제(虞祭)와 졸곡제(卒哭祭)에 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에 초우제(初虞祭)와 재우제(再虞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1681년(숙종 7) 8월 27일에 연제를 지내고, 그날 전작례(奠酌禮)를 영소전에서 거행하였다. 2개월 뒤인 10월 26일에 상제를 지내고, 다시 2개월 뒤인 12월 18일에 담제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8월 11일에 숙종의 신주를 혼전인 효령전(孝寧殿)에서 옮겨 와 태묘에 부묘할 때 영소전에 있던 인경왕후의 신주와 경녕전에 있던 인현왕후의 신주도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소전은 인경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81년 2월 22일부터 숙종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22년 8월 11일까지 경덕궁 계상전→창경궁 문정전→창경궁 명정전→창경궁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소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된 전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