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은 같지 않았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왕과 왕후의 승하하는 시기는 대부분 다르므로 각자 혼전을 설치하여 혼전명 역시 따로 지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왕후가 먼저 죽어 혼전이 설치되어 있으면, 왕이 승하하여 산릉에 시신을 매장한 뒤 혼전에 왕후의 신주와 함께 봉안하여 하나의 혼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문소전(文昭殿),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휘덕전(輝德殿),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경희전(景禧殿)이 그러하였다.
광효전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혼전이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에 승하하여 혼전을 먼저 설치하였으며, 혼전의 전각명은 ‘광효(廣孝)’라 정하였다[『세종실록』 2년 9월 9일]. 1422년(세종 4) 태종이 훙(薨)하자 광효전에 태종의 신주를 함께 봉안하였다. 태종의 3년 상제가 끝난 후에 종묘에 함께 부묘하였다.
[내용 및 특징]
1420년 7월 10일 원경왕후가 별전(別殿)에서 훙하자 명빈전(明嬪殿)에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9월에 헌릉(獻陵)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그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해 둔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세종실록』 2년 9월 17일]. 이때 창덕궁의 동북쪽에 조성한 혼전의 명칭이 광효전이다.
태종은 처음에 사가(私家)에 혼전을 마련하라고 명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창덕궁의 동쪽에 세우게 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도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헌릉에 하관(下棺)한 뒤 신주를 받들고 광효전에 봉안하였다. 광효전의 제향(祭享)에는 소찬(素饌)을 쓰다가 육선(肉膳)으로 바꾸었다. 혼전이 존재하는 동안 광효전은 원경왕후 혹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광효전으로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 상제(祥祭), 담제를 모두 거행하였다.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하자 광효전에 국상(國喪)을 고하고, 수강궁(壽康宮)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태종의 혼전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원경왕후의 혼전인 광효전을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5개월 뒤인 9월에 헌릉에서 장례를 치르고, 그날 반우하여 광효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광효전의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전(朔望奠)에 원경왕후의 신위(神位)도 함께 진설하기로 하였다. 광효전으로 반우한 날 초우제를 시작으로 칠우제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를 거쳐 소상제(小祥祭), 대상제(大祥祭), 담제를 거행하였다.
1424년(세종 6) 태종과 원경왕후를 부묘하기에 앞서 송나라의 원묘인 경령궁(景靈宮)에 위판(位版)을 봉안한 예(例)를 따라 처음으로 위판을 제작하여 광효전에 봉안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6년 2월 27일]. 부묘하기 하루 전날인 7월 11일에 세종이 광효전에 나아가 종묘를 바라보고 사배(四拜)를 하였다. 다음 날 태종과 원경왕후의 신주를 광효전에서 옮겨 와서 종묘에 부묘하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이 광효전에 위판을 봉안하였다. 따라서 광효전은 원경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420년 9월 17일부터 태종의 3년상을 마치고 원경왕후와 함께 종묘에 부묘한 1424년(세종 6) 7월 12일까지 창덕궁에 설치되었다.
[변천]
광효전은 1420년에서 1424년까지 혼전이었다가 종묘에 부묘한 이후 위판을 봉안하면서 원묘(原廟)로 성격이 바뀌었다. 원묘는 ‘원(原)’이 ‘이중’, ‘거듭’이라는 뜻으로 정묘(正廟)인 종묘가 있지만 다시 세운 사당을 말한다. 1433년(세종 15)에 태조와 신의왕후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문소전(文昭殿)과 태종과 원경왕후의 위판을 봉안한 광효전을 통합하여 새로운 문소전을 건립함으로써 광효전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