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신덕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다가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그런데 신덕왕후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인안전은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의 혼전이다. 신덕왕후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1396년(태조 5)에 승하하였다. 혼전의 전각명을 ‘인안(仁安)’으로 정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6개월 뒤 정릉(貞陵)에 장례를 치르고 인안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내용 및 특징]
1396년(태조 5) 8월 13일 신덕왕후가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한 뒤 빈전(殯殿)에 시신을 봉안했으나 빈전을 어디에 마련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6개월 뒤인 1397년(태조 6) 1월 정릉에 장례를 치르고 인안전으로 반혼(返魂)한 뒤 혼전도감(魂殿都監)을 설치하였다[『태조실록』 6년 1월 3일]. 일반적으로 혼전도감을 설치하여 혼전으로 삼을 전각을 수리했는데 이처럼 혼전을 마련한 뒤 혼전도감을 설치하기도 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계비로 태조의 왕후였다. 그러나 태조가 승하한 뒤 태종이 태조를 태묘에 부묘할 때 첫 번째 비 신의왕후(神懿王后)만 부묘하였다. 태종이 신덕왕후를 계비로 인정하지 않고 낳아주신 어머니 신의왕후만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신덕왕후는 1669년(현종 10)에 비로소 태묘에 부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안전은 경복궁 안에 있었고, 태조대와 현종대에 그 기록이 보이고 그 전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