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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08년 2월, 선조가 사망하면서 유교를 내려 어린 영창대군의 보호를 부탁한 일곱 명의 신하.
[개설]
1608년(선조 41) 2월 2일, 선조의 사망 직후 인목대비에 의해 어린 영창대군의 보호를 당부하는 유교(遺敎)가 일곱 명의 신하들에게 전달되었다. 유교를 받은 신하들은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한준겸(韓浚謙), 허성(許筬)이었다. 이들을 유교칠신(遺敎七臣)이라 하였는데, 왕실과 인척으로 연결되는 자들로서 평소 선조의 총애를 받으며 벗으로 일컬어지던 신하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대북(大北) 세력의 집권기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역사적 배경]
1606년(선조 39) 봄, 계비(繼妃) 인목왕후가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아직 명(明)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였던 광해군에게 위기가 닥치기 시작하였다. 선조 말년 영의정 유영경이 영창대군의 즉위를 지지하면서, 광해군의 왕위 계승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불확실한 상태였다. 북인(北人) 중 소북(小北)에서 갈려 나온 유당(柳黨)의 무리는 유영경을 따라 영창대군의 왕위 계승을 도모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을 필두로 한 대북(大北)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고 있었다. 유영경의 노선을 따르지 않은 남이공(南以恭) 등의 나머지 소북은 남당(南黨)을 형성하고 있었다. 1608년(선조 41) 1월 정인홍이 선조의 전위(傳位)를 방해한 유영경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병중의 선조에게 올리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한층 격화되었다. 선조는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李慶全) 등을 귀양 보내라는 명까지 내리기에 이른다[『선조실록』 41년 1월 26일].
[발단]
1608년 2월 1일 오후 선조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사망하였다. 곧이어 봉함된 선조의 유교 하나가 광해군에게 전달되었는데, 그 요지는 형제 사랑하기를 자신이 살아 있을 때처럼 하여 부디 형제들을 모함하는 참소에 현혹되지 말라는 당부였다. 인목대비로부터 선조의 또 다른 유교 하나가 일곱 명의 신하들에게 전달되었는데, 그것은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의 보호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이때 선조로부터 유교를 받은 박동량, 서성, 신흠, 유영경, 한응인, 한준겸, 허성을 가리켜 유교칠신이라 하였다. 이들은 선조의 각별한 총애와 대우를 받았던 신하들로서, 모두 왕자(王子)·부마(駙馬)의 인척들로 왕실과 연결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2월 2일].
[경과]
광해군의 즉위와 대북파의 집권은 허성을 제외한 유교칠신에게 커다란 정치적 시련을 안겨 주었다. 대북파 일부는 영창대군의 보호를 당부한 선조의 유교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고 믿는 입장이었다. 영의정 유영경은 광해군 즉위 직후 사직하였으나, 곧이어 탄핵을 받고 함경도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허성만은 임해군(臨海君) 역모 사건의 적발에 공을 세웠다 하여 익사공신(翼社功臣)에 봉해져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1612년(광해군 4)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후일 동생 허균(許筠)은 역모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으며, 허성 자신도 인조반정 이후 관작을 삭탈 당하였다. 한응인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고 삭직만 된 채 방면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에 사망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추증 받았다.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반성하며 살라는 전리방귀(田里放歸) 처분을 받았다가 이후에 다시 유배당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다시 도원수(都元帥)에 기용되어 국경 방어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을 맞이하였다. 신흠은 장남 신익성(申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이었는데, 그 역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 후 유배당하였다. 1621년에 사면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중용되었다. 서성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오랜 기간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을 계기로 풀려나 다시 중용되었다. 선조의 정비(正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사촌동생이었던 박동량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모반 혐의가 희박하여 방면되었다. 그런데, 이때 인목대비의 사주로 궁녀들이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裕陵)에 저주한 사건에 대해 무고(誣告)임을 알면서도 이를 시인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비난받아, 인조반정 이후 유배되었다가 1632년(인조 10)에야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