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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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병(南兵)

서지사항
항목명남병(南兵)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명군(明軍)
동의어남군(南軍)
관련어『기효신서(紀效新書)』, 『병학지남(兵學指南)』, 북병(北兵), 임진왜란(壬辰倭亂), 절강병법(浙江兵法), 척계광(戚繼光)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에 파견한 중국 남방 지역의 군대.

[개설]
남병은 절강병법(浙江兵法)으로 훈련된 중국 남방 지역의 정예군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왜구는 조선뿐 아니라 명까지도 침략하였다. 특히 명의 남부 지역에 위치한 곡창지대였던 절강 지역은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하여 명의 장수 척계광(戚繼光)은 별도의 전술로 무장한 병사인 남병을 구성하였다.

[조직 및 역할]
남병은 대부분 보병으로 편성되었으며 조총과 호준포(虎蹲砲) 등의 화기와 단병기로 무장하였다. 남병은 집중적 병력 운용을 통한 근접전을 중시하였다.

명의 원군으로 파견된 조승훈(祖承訓)이 거느린 북병이 일본군에게 패하자 명 조정은 남병의 파견을 결정하였고, 1592년 12월 25일 이여송(李如松)은 남병을 이끌고 의주에 도착하였다. 조선에 파견된 남병에게는 매달 안가은(安家銀) 5냥, 월량은(月糧銀) 1냥 8전이 지급되었다. 이여송이 이끈 군사는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고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일본과의 전투에서 남병이 효율적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명 내부에서는 남병의 동원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북쪽 지역 병사보다 이동거리가 긴 만큼 소집과 해산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변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남병이 구사하는 절강병법이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조정은 명의 총병(總兵) 유정(劉綎)의 군대에 조선 병사들을 편입시켜 남병이 구사하는 전술을 익히도록 하였다[『선조실록』26년 8월 13일]. 뿐만 아니라 남병들이 구사하는 전술을 익히기 위해 선조는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구하도록 했다[『선조실록』26년 9월 25일]. 또 한교(韓嶠)로 하여금 번역하도록 하고[『선조실록』27년 5월 17일], 모르는 부분은 명군에게 직접 물어 보기도 했다[『선조실록』27년 5월 17일].

『기효신서』를 조선의 실정에 맞춘 『병학지남(兵學指南)』은 전쟁 중 조직된 훈련도감의 기본 교범이 되었다.

[참고문헌]
■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7, 경인문화사, 2012.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홍을표, 「조선후기 척계광의 전법에 대한 논의」, 『한일관계사연구』44, 한일관계사학회, 2013.

■ [집필자] 방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