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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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응창(宋應昌)

서지사항
항목명송응창(宋應昌)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경략(經略), 봉공안(封貢案), 분조(分朝), 비호자모포(飛虎子母砲), 임진왜란(壬辰倭亂)
분야정치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총사령관.

[개설]
명나라의 병부(兵部) 시랑(侍郞)으로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의 총사령관인 경략(經略)이 되어 명군을 지휘하였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나,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대패하자, 일본의 관백(關白)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영파(寧波)를 통해 조공하도록 하는 등의 강화교섭안인 봉공안(封貢案)을 주도하였다.

[가계]
[활동 사항]
1565년 진사에 뽑혔고, 복건포정사(福建布政司), 산동순무(山東巡撫)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1차로 파병 온 조승훈이 3천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요동으로 돌아가자, 명나라는 경략 송응창을 총사령관으로,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지휘관으로 한 5만여 명의 군사를 2차 원병으로 보냈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뒤, 명군의 남병(南兵)과 북병(北兵) 간에 논공행상에 대한 다툼이 있었는데, 이것은 절강(浙江) 출신인 송응창과 요동(遼東) 출신인 이여송의 갈등으로 번졌다. 이에 자극받은 이여송이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碧蹄館)에서 패하자, 송응창은 요동으로 돌아가 선조로 하여금 평양에 머물면서 왕성을 수복하도록 자문을 보내어 독려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6년 2월 11일]. 그리고 그는 군사를 파견하거나, 부상병을 돌려보내거나,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다.

송응창은 벽제관 전투 후, 명군이 이미 지치고 숫자도 적으며 진격할 수 없다는 이유로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영파(寧波)를 통해 조공하도록 하는 등의 봉공안(封貢案)을 주도하였다[『선조실록』 26년 4월 1일][『선조실록』 27년 4월 23일].

또한 조선의 세자시강관(世子侍講官)과 배신(陪臣) 두세 명을 자신에게 보내게 하여 강론과 토론을 통해 구두(句讀)를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세자를 가르치도록 요청하였고, 이에 문학(文學) 유몽인(柳夢寅), 사서(司書) 황신(黃愼), 설서(說書) 이정구(李廷龜)가 파견되었다[『선조실록』 26년 4월 14일].

그리고 왕세자인 광해군이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다스리도록 명나라 황제에게 주청하여, 이에 대한 황제의 성지(聖旨)와 칙서(勅書)가 내려오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6년 9월 1일]. 그 결과 왕세자의 분조(分朝)가 유정(劉綎)과 함께 남방을 경리(經理)하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26년 12월 1일]. 화약무기인 비호자모포(飛虎子母砲)를 만들기도 하였고, 조선의 은광을 시험 삼아 채굴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11월 17일][『선조실록』 32년 2월 24일].

일본과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요동과 조선을 넘나들며 조선 수군의 일본 공격, 선조의 왕성 진주, 요해처의 관방(關防) 설치와 방어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무리한 강화 요구가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조선 사신의 중국 입경을 가로막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6년 5월 1일][『선조실록』 26년 5월 27일][『선조실록』 27년 1월 20일]. 그러나 명나라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 상황 등을 명백하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송응창을 대신하여 시랑(侍郞) 고양겸(顧養謙)을 경략(經略: 한자 중복 삭제)으로 삼았다[『선조실록』 26년 5월 1일]. 이후 탄핵되어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지만, 결국 귀양을 가게 되었다[『선조실록』 27년 4월 26일][『선조실록』 27년 5월 11일][『선조실록』 32년 1월 21일].

[학문과 사상]
그는 한 권의 『중용』이나 『대학』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모름지기 경학(經學)에 유념할 것이요, 주자(朱子)의 집주(輯註)에 너무 빠질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선조실록』 26년 4월 1일]. 또한 사람의 마음은 본래 선하지만 도심(道心)은 은미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로운 것이라서,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실행한다면 자연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진(秦)·한(漢) 이후의 문장(文章)과 사부(詞賦)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니 마음을 둘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선조실록』 26년 4월 1일]. 그가 주자와 같은 신유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동정기사(東征記事)』,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 『도기도설(道器圖說)』, 『심경모서(心經茅鋤)』, 『규측진전(窺測陳筌)』

[참고문헌]
■ 강응천 외,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민음사, 2013.

■ [집필자] 남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