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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개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단종 즉위 직후부터 준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사신으로 명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규합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수양대군은 심복들을 거느리고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 중 구심점 역할을 했던 김종서(金宗瑞)의 집을 먼저 습격해 그를 죽였다. 이후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 죽였다고 보고한 뒤 왕명을 얻어 황보인(皇甫仁)과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등을 궁궐로 불러들여 모두 살해하였다.
그리고 김종서의 가족들을 처형하고, 조극관 등의 가족들은 귀양을 보낸 뒤 죽였다. 또 김종서·황보인 등과 함께 모반을 꾸몄다는 명목으로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보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왕명으로 자살하도록 조치했다. 수양대군 일파는 이를 ‘정난’이라 칭하였다. 이를 마무리 한 수양대군은 영의정과 이조 판서, 병조 판서는 물론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새로 설치하고 본인이 모두 겸직했다. 이를 통해 인사권과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사실상 국정 책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자신을 포함한 측근 세력 43명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하면서 권력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선양(禪讓)을 받는 형식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 태조를 이어 제2의 창업지주(創業之主),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자처했다. 아울러 자신이 주도했던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결탁해 모반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신은 단순히 이미 이뤄놓은 것을 지키는 수성지군(守成之君)이 아니라 창업지주라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적 배경]
1452년 단종이 즉위할 때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더욱이 당시 조선에서는 대리정치 형태인 수렴청정(垂簾聽政) 제도가 정착되어 있지 않았고, 수렴청정이 이루어진 경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단종의 모친 권씨도 세자빈 때 단종을 낳은 뒤 바로 죽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종은 죽기 전에 황보인과 남지(南智)·김종서 등의 대신들에게 단종의 보좌를 특별히 부탁했다. 그러나 단종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좌의정 남지가 먼저 사망했다. 따라서 김종서와 황보인이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는 문종 이외에도 수양대군·안평대군·임영대군(臨瀛大君)·광평대군(廣平大君)·금성대군(錦城大君)·평원대군(平原大君)·영응대군(永膺大君) 등 일곱 명이 더 있었다. 세종은 국정을 운영하는 동안 이들에게 다양한 임무를 부여하면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경과]
수양대군이 정변을 계획했던 시기는 단종 즉위 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수양대군은 측근이었던 권람(權擥)이 자신을 방문하자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아울러 홍윤성(洪允成)과 한명회(韓明澮) 등을 자신의 세력에 포함시켰다.
거사 계획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 4월,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면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수양대군의 사행은 권람 등이 김종서와 황보인의 움직임을 우려하며 적극적으로 말렸던 일이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사행을 다녀왔다. 이는 수양대군이 당시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김종서나 황보인 등이 역모를 계획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황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수양대군은 신숙주(申叔舟)를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고,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의 심복 무사들을 준비시켰다. 같은 해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유숙(柳淑)·양정·어을운(於乙云)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그를 죽인 뒤 입궐해서 단종에게 김종서가 역모를 일으키려고 해 죽였다고 주장했다. 또 수양대군은 왕이 측근 인사를 비밀리에 부르는 밀소(密召)를 이용해 황보인·조극관·이양 등의 대신들을 궁궐로 불렀다. 이들은 별다른 준비 없이 궁궐로 왔다가 궁문에서 살해당했다[『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한편 안평대군은 김종서·황보인 등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賜死)했다. 정분·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 등의 인물들도 정난에 연루시켜 귀양 보냈다가 곧 교살시켰다[『단종실록』 1년 10월 13일].
수양대군 세력은 국내만이 아니라 변방 지역에 있는 장수들에도 조치를 취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조치를 취했던 인물이 당시 현재의 함경도에 해당하는 함길도절도사로 재임하고 있던 이징옥(李澄玉)이었다. 수양대군 세력은 이징옥이 김종서의 일당이라는 명분으로 파면했다. 그의 후임으로 박호문(朴好門)을 임명했다. 그러자 이징옥은 수양대군의 조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후임으로 왔던 박호문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휘하의 병력을 인솔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면서 여진 세력까지 규합해 새로운 집단을 만들고자 시도했다[『단종실록』 1년 10월 25일]. 하지만 종성부사 정종(鄭種)의 계략에 빠져 잡혀 죽었고 그의 반란은 무위에 그쳤다.
계유정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영집현전사·영경연사·영춘추관사·영서운관사·겸판이병조·내외병마도통사의 관직을 겸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조선의 인사권과 군사권 등의 핵심적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아울러 거사에 공을 세웠던 정인지·권람·한명회·양정 등과 자신까지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했다. 이로부터 2년 후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위를 받는 형식을 취하면서 왕의 자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