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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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劉綎)

서지사항
항목명유정(劉綎)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누르하치[奴兒哈赤], 도독(都督), 동로군(東路軍), 순천왜성(順天倭城), 심하(深河) 전투,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제독(提督), 총병(總兵)
분야정치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의 장수.

[개설]
평양성 전투 후 명나라는 사천 총병인 유정을 복건 등처의 소모병(召募兵)을 거느리게 하여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유정은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주요 거점에 주둔하면서 조선을 방어하였다. 이후 명나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 때 제독(提督)이 되어 재파병되었다. 순천왜성에 주둔한 소서행장(小西行長)을 공격하였으나, 그와 비밀리에 협상을 맺고 물품과 인질을 서로 교환한 후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여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후 명나라로 돌아가 도독(都督)으로 승진하였다. 1619년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속한 동로군(東路軍)의 사령관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가계]
아버지는 명나라의 대장군(大將軍) 도독 유현(劉顯)이다. 양자(養子)는 유초손(劉招孫)이다.

[활동 사항]
유정은 부친을 따라 13세부터 종군(從軍)하여 무인(武人)이 되었으며, 영창(永昌) 등지에 침입한 면전(緬甸: 현 미얀마)의 군사를 격퇴하였고, 운남(雲南)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1592년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 이듬해인 1593년에 참전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원군을 파견하여 평양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평양성을 함락한 뒤 화기수 중심의 남병(南兵)과 기병 중심의 북병(北兵) 사이에 논공행상과 관련한 갈등이 발생하자 이여송(李如松)은 북병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추격하였다가 벽제관(碧蹄館)에서 큰 패배를 당하였다. 이에 명군 지휘부는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추가로 군사를 파견하였다.

평양성 전투 후, 명나라에서는 사천총병(四川總兵)인 유정을 복건(福建)·서촉(西蜀)·남만(南蠻) 등처의 소모병(召募兵)을 거느리게 하여 조선으로 파견하였다[『선조수정실록』 26년 5월 1일]. 1593년 4월 유정은 남병 약 5,5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유정이 이끌던 남병 중에는 섬라(暹羅: 현 타이)·도만(都蠻)·소서천축(小西天竺: 현 인도 지역)·육번득능국묘자(六番得楞國苗子)·서번삼색(西番三塞: 현 티베트)·면국(緬國: 현 미얀마)·파주(播州)·당파(鏜鈀) 출신의 군사들이 있었다[『선조실록』 26년 4월 2일][『선조실록』 26년 4월 10일].

유정은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군사를 이끌고 대구·합천·상주 등에 주둔하면서 방어하였다[『선조실록』 26년 7월 10일][『선조실록』 26년 8월 1일][『선조실록』 26년 9월 6일]. 명나라에서 유정의 군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으나 남원(南原)으로 내려가 3개월을 지체하면서 형세를 관망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7년 5월 15일][『선조실록』 27년 7월 5일]. 유정은 명나라에서 일본에 대해 봉공(封貢)을 허락하더라도 일본은 반드시 강화를 요구하러 또 올 것으로 예상하였고, 봉공이 허락되지 않으면 철병령에 따라 압록강을 한계로 방어할 생각이었다[『선조실록』 27년 7월 5일].

또한 조선의 영남(嶺南) 지방 백성들의 굶주림을 생각해서 쌀과 콩을 멀리서 운반해 와 진휼하기도 하였고, 조선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아랫사람을 매우 엄격하게 단속하였다[『선조실록』 27년 8월 1일][『선조실록』 27년 8월 17일]. 유정은 일본과의 강화협상 및 봉공에 대해 반대하였으나 결국 1594년 9월 중국으로 철병하였다[『선조실록』 27년 9월 11일][『선조실록』 27년 11월 18일].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군이 울산성을 포위했다가 일본군의 원병 파견으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자, 유정은 제독(提督)으로서 1만 2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선조실록』 31년 5월 16일][『선조실록』 31년 6월 18일]. 그때 그의 정식 관명(官名)은 제독한토관병어왜총병관우군도독첨사(提督漢土官兵禦倭總兵官右軍都督僉事)였다[『선조실록』 32년 7월 17일].

유정은 남원에 주둔하였다가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주둔한 예교(曳橋, [倭橋]), 즉 지금의 순천왜성으로 진군하여 일본군을 포위하고 접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공세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선조실록』 31년 9월 7일][『선조실록』 31년 9월 24일]. 결국 유정은 소서행장과 비밀리에 화의(和議)를 맺고 금·비단과 인질을 서로 교환한 다음 그가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고 일본군이 철수하자 순천왜성에 들어갔다[『선조실록』 31년 11월 23일][『선조실록』 32년 2월 1일]. 일본군이 물러간 왜성에 들어가서는 성가퀴를 허물어 성을 함락시킨 것처럼 하고, 땅에 묻은 시체의 머리를 잘라 자신이 잡은 것처럼 전공을 과장하였다[『선조실록』 32년 2월 2일].

전쟁이 종결되고 일본군이 철수한 뒤 명으로 귀국한 유정은 일본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도독(都督)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32년 10월 13일].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奴兒哈赤]를 공격할 때 조명연합군이 속한 동로군의 사령관이었고, 후금군과 심하의 부차(富車) 전투 때 전사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11월 9일][『광해군일기』 11년 4월 10일].

[학문과 사상]
[저술 및 작품]
『각관대회영창연집부시(各官大會永昌宴集賦詩)』,『평파개선술회(平播凱旋述懷)』

[묘소]
[상훈 및 추모]
소보(少保)가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 [집필자] 남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