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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특정한 관직을 부여받지 않은 상태에서 군무에 종사하는 것을 일컫는 용어.
[개설]
조선시대 관료들은 의식에 참가할 때 금관조복(金冠朝服), 업무를 볼 때는 소매가 넓고 깃이 둥근 단령(團領)과 직급에 따라 색깔이 다른 도포를 입었다. 이에 비해 일반 백성들은 색깔이 없는 흰옷을 입었으므로 백의란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이미 관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그 직을 잃고 특정한 관직에 임명되지 않은 채 군무에 종사하는 것을 백의종군이라 불렀다.
[내용 및 특징]
백의종군은 전투에서 패하는 등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공적을 세워 자신의 죄를 씻으라는 의미에서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백의종군의 명을 처음 받은 이는 연산군 때 김계종(金繼宗)이었다. 김계종은 성종의 상중(喪中)에 음탕한 짓을 한 죄로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다[『연산군일기』5년 7월 22일]. 중종대의 경우 삼포왜란(三浦倭亂) 당시 도망간 윤효빙(尹孝聘)·이해(李海) 등에게 백의종군이 명해졌다[『중종실록』5년 4월 19일]. 또 정광필(鄭光弼)이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미 파직된 이종인(李宗仁)에게 관직을 내리거나 백의종군케 할 것을 건의한 기사 등이 보인다[『중종실록』17년 6월 26일].
『조선왕조실록』에 백의종군 관련 기사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였다.
##00015360_표1_임진왜란 당시 백의종군 인물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백의종군의 명은 임진왜란 초기에 집중적으로 내려졌다. 이는 전황이 급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백의종군의 명을 받은 것은 조선 장수들만이 아니었다. 선조 때의 학자인 신흠(申欽)의 문집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에는 명 장수 복일승(福日昇)이 작전 기한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로 보아 백의종군은 조선뿐 아니라 명에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외 백의종군 관련 기록은 광해군대와 인조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명청교체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군사행동이 많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외 현종대와 영조대의 경우 전쟁과 관련 없이 백의종군토록 한 사례가 나타나는데, 이는 모두 왕의 행차 때 호위를 잘못하거나 길 안내를 잘못한 경우이다.
[변천]
백의종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이순신(李舜臣)이다. 이순신은 특이하게도 두 차례나 백의종군한 인물이다. 1587년 비변사(備邊司)에서 녹둔도(鹿屯島)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 등의 처벌을 건의하자 선조는 백의종군케 하였다[『선조실록』20년 10월 16일]. 1597년 1월에는 국왕을 속이고 조정을 가볍게 여겼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다[『선조수정실록』30년 2월 1일]. 이때 정탁(鄭琢)에 의해 구원돼 이순신은 백의종군할 수 있었다.
원균(元均)이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한 후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고, 궤멸 상태였던 조선 수군을 이끌고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백의종군 하면 이순신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術)』
■ 김봉렬, 「李舜臣의 白衣從軍 시기 행적에 관한 고찰」, 『인문논총』25,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