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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아악(雅樂)은 기악[樂]·노래[歌]·춤[舞]으로 구성되어 궁중의 다양한 제사에서 쓰인 종합예술이다.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이 전래되면서 아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초기 세종대에 박연(朴堧)에 의해 대대적으로 정비되고, 그 전통이 대한제국기까지 지속되었다. 현재에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만 전승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아악은 일정한 음악적 구성 원리를 지닌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아악 선율은 7음계, 한 곡은 총 32음, 음악의 시작음과 끝음이 일치하는 기조필곡(起調畢曲), 가사 1자에 음 1개가 배치되는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 [syllabic style])이다.
악대는 우주 자연의 질서와 연계된 팔음(八音)의 악기를 구비하여야 한다. 또한 하늘 제사, 땅 제사, 인귀에 대한 제사의 종류에 따라 각각 뇌고(雷鼓)·뇌도(雷鼗), 영고(靈鼓)·영도(靈鼗), 노고(路鼓)·노도(路鼗)를 특별히 진설한다.
춤은 일무(佾舞)를 사용한다. 일무는 줄 춤이란 뜻으로, 줄을 선 채 그 대열을 이탈하지 않고서 춤추는 특성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제후국의 격에 맞는 육일무(六佾舞)를 사용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는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팔일무(八佾舞)로 격상되었다.
또한 아악은 조선초기에 아악서(雅樂署)라는 음악 기구를 별도로 운용할 정도로 전문적으로 관리되었다. 그리고 아악서는 세조대에 이르러 전악서(典樂署)와 함께 장악서(掌樂署)라는 음악 기구로 통합되었고, 다시 장악원(掌樂院)으로 이어졌다. 장악서, 장악원에서는 아악을 그 기관의 좌방(左坊)에 소속된 악생(樂生)에게 연주하게 하였다. 악생의 신분은 양인(良人)으로, 천인 계층에서 선발되어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던 악공(樂工)과 차별화되었다. 즉 아악을 연주하는 악생의 출신이 더 낫고, 그 위상도 악공에 비해 더 높았다.
[변천]
아악은 1116년(고려 예종 11)에 중국 송나라에서 유입된 대성아악에 연원을 둔다. 대성아악은 등장 직후 제례 악무로 사용되었고, 그 전통이 조선시대로 전승되었다. 그런데 고려에서 전래된 조선초기의 아악은 문제가 많았다.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기본적인 악기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소리는 조화롭지 못했고, 연주되는 음악은 원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아악 정비 사업이 단행되었다. 세종의 아악 정비는 박연에 의해 실행된다.
박연은 중국 주나라의 음악 제도를 이상향으로 상정한 후, 치열한 고증과 실험 끝에 『주례』에 밝혀진 내용에 약간의 해석을 가해서 조선의 아악을 탄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대성악보(大成樂譜)』 등의 서적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그 결과물인 율관 제작, 아악기 조성, 제례 아악 정비, 조회 아악·회례 아악 제정, 아악의 음악 이론 정리 등 박연의 노고가 서려있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세종대에는 박연에 의해 아악의 전성시대가 펼쳐졌지만 제례 아악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조회 아악이나 회례 아악은 세종대가 지나자 더 이상 연주되지 않았다. 세종대의 아악은 『세종실록』 「악보」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세종대에 복구되었던 제례 아악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발발로 인해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아악기가 분실되거나 파손되었고, 아악을 연주하던 악인(樂人)들이 사망 혹은 실종되는 등의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영조대와 정조대에 아악을 다시 정리하였고,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는 황제국의 위격에 맞게 원구 제례악까지 추가되어 그 위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례 문화가 축소되면서 이에 수반되던 아악도 연주되지 않게 되어, 현재 문묘제례악만 단절 없이 지속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제례를 다시 복원하면서 제례 아악도 조선시대의 문헌과 악보를 토대로 복구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