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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원접사가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하던 의주성 밖의 객관.(客館)
[개설]
중국에서 사신이 파송된다는 패문(牌文)이 이조(吏曹)에 도착하면 조선 조정에서는 사신 접대의 총책임자인 원접사(遠接使)를 비롯해서 문례관(問禮官)·차비관(差備官)·영위사(迎慰使) 등을 임명하여 중국 사신의 영접을 준비하였다. 의순관은 원접사가 조선에 파송된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 동시에 배웅하는 사대외교의 최전선이었다.
[위치 및 용도]
평안도 의주성에서 남쪽으로 2리(약 0.8㎞) 되는 압록강 물가에 있으며, 원접사를 비롯한 조선 측 영접관원들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곳이다.
[변천 및 현황]
의순관의 본래 옛 이름은 망화루(望華樓)였는데 세조대에 누(樓)를 철거하고 관(館)을 두었기에 의순관으로 바뀌었다. 중국 사신이 나오게 되면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원접사 혹은 현지 지방관인 평안도관찰사가 의순관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동시에 귀로에 배웅하였다. 후에 성종대에 용만관(龍灣館)이 의주성 내에 추가로 설치되면서 중국 사신 접대처가 이원화된 듯 보이는데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사용한 듯하다[『선조실록』 25년 9월 1일]. 중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배웅하는 도중에서 중국 사신과 조선 측 영접관원들은 시를 주고받으며 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모아 1773년(영조 49)에 『황화집(皇華集)』이라는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형태]
규장각에 소장된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를 참고해 보면 의순관은 의주성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채 한 동과 본채 좌우의 별채 각각 한 동씩 모두 세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바깥에 네모반듯한 모양의 담장이 둘러 감싸고 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그림은 1572년 10월 명 신종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한세능(韓世能)을 맞아 의주의 의순관에서 행한 영접 의식을 그린 것으로서 16세기 말 의순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의주까지 파천한 선조는 명나라에 구원군을 청하는 일 이외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였고, 상황의 다급함을 인지한 명나라 조정에서도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원군을 이끌고 건너가게 하였다.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1592년(선조 25) 12월이었는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이때 선조는 붉은색 비단 전포(戰袍)를 입고 의순관에서 이들을 맞이하였다. 이보다 앞서 9월에 설번(薛藩)이 칙서를 받들고 와서 반포하였을 때에도 선조는 의순관 길까지 나가 영접하였다고 한다. 『선조실록』에서도 선조가 이여송을 의주성 남문 밖으로 나아서 임시 거처인 막차(幕次) 밖에서 영접하였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곳이 의순관이었을 것이다[『선조실록』 25년 12월 25일]. 유황상(劉黃裳)·심유경(沈惟敬)·황응양(黃應陽) 등 다른 중국 측 사절의 경우 대개 용만관에서 영접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설번과 이여송의 경우는 선조에게 조금 더 중요하고 특별하게 취급해야 할 필요성이 높았던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