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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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연(聞喜宴)

서지사항
항목명문희연(聞喜宴)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경림연(瓊林宴), 곡강연(曲江宴), 곡강회(曲江會)
관련어관우희(觀優戱), 기악(妓樂), 방방(放榜), 삼일유가(三日遊街), 은영연(恩榮宴), 창악(唱樂)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과거 급제자가 자신의 집으로 가까운 친구와 친척을 초대하여 베푸는 자축 연회.

[개설]
과거 급제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합격증서를 받은 후 삼일유가(三日遊街)와 문희연(聞喜宴)을 행하였다. 이때 재인과 광대를 불러다 공연을 선보이고 갖가지 음악과 연희를 베풀었는데, 특히 문희연은 광대의 판소리가 성장하게 되는 공식 무대였다. 국가에 큰 흉년이나 재이가 있을 때는 행사를 금지하였다.

[내용 및 특징]
문희연은 당송(唐宋)시대의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는 급제한 사람을 위해서 당시 도읍지에 있던 유명한 연못이었던 곡강(曲江)에 있는 정자에서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에 곡강연(曲江宴) 혹은 곡강회(曲江會)라고 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황제의 정원이었던 경림원(瓊林苑)에서 베풀었으므로 경림연(瓊林宴)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하면 양산 모양의 의장물인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 안에서 크게 놀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문희연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풍습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자들이 3일 동안 거리를 행진하며 연희를 베풀었던 삼일유가가 이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과거에 합격하면 국가에서 길일을 택해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합격증인 홍패(紅牌), 백패(白牌), 모화(帽花), 개(蓋), 주과(酒菓) 등을 하사받는 방방의(放榜儀)를 행하고 이들을 축하하는 은영연(恩榮宴)을 베풀어준다. 과거 급제자는 방방 후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연주하게 하면서 거리를 돌며, 과거 시험관·선배·친척들을 찾아보는 삼일유가를 행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친척이나 친구를 초대하여 급제를 축하하는 문희연을 베풀었다.

문희연은 과거와 관련된 의례적인 행사였으나 국가적 상황이나 개인의 형편에 따라 행하지 않기도 하였다. 국가적 흉년이나 재이(災異)를 당할 때는 공식적으로 삼일유가와 문희연을 금지하였다[『현종실록』 3년 2월 19일], [『현종실록』 7년 3월 16일], [『숙종실록』 21년 9월 24일]. 이때 금령을 어기고 문희연에서 성대하게 풍악을 울릴 경우 잔치 주관자뿐 아니라 참여자까지 파직을 면하기 어려웠다[『현종실록』 3년 4월 19일], [『숙종실록』 30년 8월 23일]. 또 개인적 이유나 집안 형편에 따라 문희연을 행하지 않기도 했다. 조선중기 임서(林㥠)는 아들이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국상(國喪)의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회를 베풀지 않았으며 순조 때 송만재는 집안이 가난하여 아들의 문희연을 「관우희(觀優戱)」라는 시로 대신하였다.

삼일유가 및 문희연에는 재인과 광대의 음악과 연희가 따랐다. 조선후기에는 재인광대가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고서 앞길을 인도하였으며 급제자의 집에 돌아와 조상의 사당에서 합격증인 홍패나 백패를 놓고 올리는 홍패고사나 백패고사 등을 올렸다. 문희연에는 소학지희나 판소리 같은 각종 공연이 펼쳐졌는데, 이때 박남(朴男), 원창(遠昌) 등의 명창이 명성을 날렸다. 간혹 국가적인 행사에서나 할 법한 화려한 무대인 채붕까지 설치하고 선기(選妓) 70명을 동원했다고 소문날 정도로 극도로 사치스러운 문희연을 베풀기도 하였다[『경종실록』 즉위년 8월 4일].

[변천]
조선후기에 영조는 문희연 등의 의례에 중국 진사과(進士科)의 복식과 의식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급제자들이 방방의에 나올 때 중국의 관복 제도인 복두(幞頭)난삼(襴衫) 차림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제도를 구체적으로 상고할 수 없어 그와 같은 조치는 중지되었고, 이전 풍습대로 행하였다[『영조실록』 부록 영조 대왕 행장(行狀)].

한편, 조선후기 문희연은 판소리의 성장과 관련이 깊다. 판소리가 문희연을 통해 문인들에게 소개되면서 궁중으로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판소리 사설이 양반 향유층을 고려한 방향으로 첨삭되었다. 요컨대 판소리가 문희연을 통해 발전하면서 판소리 및 판소리 창자에 대한 위상도 급부상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 『청음집(淸陰集)』
■ 『소재집(疎齋集)』 「만록(漫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종철, 『판소리사 연구』, 역사비평사, 1996.
■ 이혜구,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 『한국음악연구』, 국민음악연구회, 1957.

■ [집필자] 김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