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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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소(衛所)

서지사항
항목명위소(衛所)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명(明),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도사(都司), 위사(衛司), 천호소(千戶所), 백호소(百戶所)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명나라에서 국경이나 내륙의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한 지방 군사 기구.

[개설]
위소는 명나라 홍무제 때 전국의 각 군사 요충지에 설립한 군사 기구이다. 명나라는 대도독부(大都督府)-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위(衛)·소(所)로 연결되는 군사 제도를 운영하였다. 위소는 군정(軍政) 합일(合一) 기관인 도지휘사사에 예속되어 있었고, 한 개의 위는 5,600명으로 편성되어 5개의 천호소(千戶所)로, 한 개의 천호소는 1,120명으로 구성되었다. 군사 요충지에 설치된 위와 소는 부·주·현을 폐지하고 설치되었기 때문에 관할 지역의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감찰·경제·법률·교육·징세 등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명나라는 대도독부-도지휘사사-위·소로 연결되는 군사 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위소는 도지휘사사에 예속된 하급의 지방 군사 기구이다. 명을 건국한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는 새로운 군사 제도를 시행하여 중앙에는 최고의 군사 기구인 대도독부를 두고 전국 18행성(行省)의 군사를 지휘하는 도지휘사사를 관할하게 하였다. 행성은 조선의 도에 해당한다.

도지휘사사는 도사(都司)로 줄여 부르기도 하였는데, 각 성에 설립된 최고 군사 기구의 성격을 가졌으며, 군정 합일 기관이라 할 수 있다. 1380년(명 홍무 13년) 대도독부는 다시 중·좌·우·전·후군의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로 체계화되었고, 각 성(省)은 도사 아래에 위소(衛所)를 두어 관할하였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보낸 칙서에는 ‘도부(都府)는 나라의 군정(軍政)을 관장하고, 도사(都司)는 한 방면(方面)을 제어하며, 위소(衛所)와 변위(邊圍)가 각기 믿을 만한 땅에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국가를 방위한다’고 하고 있다[『세종실록』 7년 2월 25일].

위소는 수당(隋唐) 시대의 부병제(府兵制)를 기초로 하여 원(元)나라 때부터 시행되었지만, 명나라에 와서야 발전하였다. 1위는 지휘사(指揮使)가 관할하는 5개의 천호소로 구성되었으며, 천호소마다 천호 1인씩을 임명하였다. 1384년에 전국의 각 군사 요충지에 위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국경이나 내륙의 전략적 요충지에 약 5백여 개의 위소가 배치되었다.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요동도사(遼東都司)를 보면, 1387년을 전후해서 기존의 부·주·현을 모두 폐지하고, 이를 대신하는 다수의 위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요동지(遼東志)』에는 총 25개의 위가 요동도사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요동도사와 위소는 관할 지역의 군사·행정·감찰·경제·법률·교육·징세 등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이주해 온 조선인 등을 정착·안정시키고 회유하면서 관할하기 위해 위소를 설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동녕위(東寧衛)·삼만위(三萬衛)·해주위(海州衛)이다.

또한 몽골족과 여진족 등 이민족에 대해서도 위소로 편입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진 지역에 설치된 건주위(建州衛)이다. 이것은 몽골족과 여진족을 회유하고 복속시켜서 위소체제에 편입하고 북방의 방어를 도모하려 한 것이었다. 이들 위소는 ‘외이위소(外夷衛所)’로 기록되어 있어서 기미위소(羈縻衛所)로 볼 수 있는데, 기미위소는 명나라에 종속되지 않았던 위소를 의미한다.

[조직 및 역할]
명의 최고 지방 정치 기구인 행성에는 군사를 관리하는 도지휘사사뿐만 아니라 민사를 관리하는 포정사(布政司), 형사를 관리하는 안찰사(按察使)가 있었으며, 이들을 합쳐 삼사(三司)라고 하였다. 도사에는 정2품인 도지휘사사 1명, 종2품인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 2명, 정3품인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 2명 등의 관직을 설치하고 위소 관리, 군사 훈련, 둔전 경영 등의 역할을 맡겼다. 도사 아래에는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와 천호소·백호소(百戶所)를 두었으며, 위사에는 정3품인 지휘사(指揮使) 1명, 종3품인 지휘동지(指揮同知) 2명, 정4품인 지휘첨사(指揮僉事) 4명을 두고 업무를 분담하였다. 위지휘사사는 줄여 위사라고도 불렀다.

일반적으로 1위는 5,600명으로 구성하였고 지휘사 등이 관할하였다. 1위는 5개의 천호소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천호를 임명하였다. 1천호소는 1,120명으로 구성하였고, 10개의 백호소로 나뉘었으며, 1개의 백호소는 2개의 총기(總旗)로, 1개의 총기는 5개의 소기(小旗)로 구성되었다. 천호소에는 정5품인 정천호(正千戶), 종5품인 부천호(副千戶), 종6품인 진무(鎭撫) 등을 두고 업무를 분담하였다. 이 중 진무는 주로 군법과 형옥에 관련된 일을 맡았고, 백호(百戶)를 대신하여 사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위소군(衛所軍)은 주로 징발된 자, 귀부한 자, 충군(充軍)한 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징발된 자에는 농민군이나 원나라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던 군사 등이, 귀부한 자에는 주로 투항한 원나라 군사들이, 충군한 자에는 죄인이 주요한 구성원이었다. 그리고 타집군(垜集軍)이 있었는데, 이는 전국 각지에서 평민을 징발하여 군인으로 삼는 제도로 세습적으로 군적(軍籍)에 편입되었다. 명나라 때에는 민적(民籍)과 군적이 구분되었으며, 군적은 군호(軍戶)라 하였고, 군호는 기본적으로 세습되었다.

한편 여진 지역에 설치된 건주위를 포함한 모든 위소는 ‘외이위소(外夷衛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진이 명나라에 종속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여진 지역 위소와 명나라와의 정치·경제적 관계는 주로 조공과 마시(馬市)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건주삼위는 명나라의 요동 정책에 협력하면서 조공과 마시를 통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경제적 이득이 없을 경우에는 명나라를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을 노략하기도 하였다.

[변천]
명나라 시기 위소군(衛所軍)은 대부분 둔전(屯田)에 종사하였으므로 ‘둔병(屯兵)’이라고도 하였다. 명나라 초기에는 내지에서 상당수의 군량을 변방으로 수송했으며, 이 때문에 내지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조정은 둔전 정책을 시행하여 군량 수급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해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변경에 설치된 도사와 위소는 군량을 자체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대부분의 군인들을 둔전에 종사시켰다.

그러나 부임한 관리들이 지역의 토지를 몰래 점유하고 위소의 군사를 부리면서, 많은 군인이 도망하거나 둔민(屯民)이 개인의 전호(佃戶)로 전락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군사들의 근무 조건 역시 열악하였으며, 병사들의 지위 역시 세습되고 있었다. 열악한 변경의 상황에서 도망하는 위소의 군사가 증가하였으며, 위소 군사의 감소는 변방을 방어할 군사력의 감소를 뜻하였다. 이것은 전투력의 약화뿐만 아니라 변방의 군사 제도인 위소 제도의 붕괴라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모병제(募兵制)로 변천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2 : 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5.
■ 남의현, 『명대 요동 지배 정책 연구』, 강원대학교출판부, 2007.
■ 유재춘·남의현·한성주, 『근세 동아시아와 요동』, 강원대학교출판부, 2011.

■ [집필자] 한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