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논어(論語)』 「안연(顔淵)」에서 안연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예의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한 말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극기복례의 구체적인 조목으로 공자는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廳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4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즉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에서 예에 맞도록 생활하여야 도덕적인 표준에 부합하며 남을 배려하는 인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기복례의 전통적인 해석은 송대의 주희가 제시하였다. 주희는 극(克)을 이김, 기(己)를 자신의 사욕, 복(復)은 돌아감, 예(禮)를 천리의 절문(節文)이라고 하였다. 사적인 욕망의 절제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공인하는 합리적 행동 질서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성리학이 발달하였던 선조 이후 극기는 곧 사욕을 극복한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주희와는 달리 청대의 대진(戴震)은 욕(欲)은 성(性)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私)가 개입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고, 극기복례는 자신의 사욕을 제거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도 함께 이루는 것이 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극기복례는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천하의 바른 예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 이후 극기복례의 용어가 나타난다. 즉 연산군이 성종 사후 불교식 재를 지내려고 하자 경연에서 시독관 김수동(金壽童)이 극기복례라는 구절의 해석을 빌려 그 잘못을 지적하였다. 즉 예란 천하에 바른 것이니, 국왕이 천하를 거느리는 도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무조건 선대의 것을 따라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 잘못된 것은 바로잡는 것이 진정한 예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12월 26일]. 이후 선조 때 이이는,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하지만 사욕 때문에 천리를 회복하지 못하는데, 안연은 극기복례하여 사욕을 극복하고 성품을 온전히 하였다고 언급했다[『선조실록』 8년 10월 24일]. 숙종 때에는 형조 참판 이봉징(李鳳徵)이 극기복례에 대하여 사욕을 제거하는 것이 복례의 근본이고, 복례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된다고 강조하였다[『숙종실록』 24년 9월 15일].
이처럼 조선시대에 극기복례는 개인의 사욕이 아닌 공적인 예로 돌아갈 것을 촉구할 때 주로 쓰이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