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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면리는 조선시대 군현의 하부 행정 조직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정에서는 군현제(郡縣制)와 외관제(外官制)를 정비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수령을 중심으로 지방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군현 하부에 면(面)과 리(里)를 편제하여 국가가 촌과 민을 지배했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 이후 수령 중심의 지배 체제를 지향하여 지방 사회의 토호적 유력층의 서민 침탈과 자의적 지배 형태를 배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면리의 편제로 민의 유이(流移) 현상을 억제하고 농업 경영과 의례를 교화하여 촌락 사회의 안정적 사회 질서를 도모하려 하였다. 나아가 수취 체제의 안정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태종실록』 8년 11월 23일].
면리 편제는 호적법과 호패법이 시행되면서 촉진되었고, 농업 기술의 발전과 소농 경영의 발달에 근거하여 자연촌이 성장하면서 정착되어 갔다. 면리는 촌락 생활의 공동체적 기반을 배경으로 부세의 운영 과정에서 수취 단위가 되었다. 면리의 운영 담당층인 면임(面任)과 이임(里任)이 면리 내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재결권을 가지면서 면리의 공동체적 성격은 강화되어 갔다[『정조실록』 2년 1월 10일].
20세기에 들어서 군현제가 해체되고 근대적 행정 조직이 시행되는 상황에서도 면리제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근현대 사회에서 면리제는 여전히 행정 편제로 유지되고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여말 선초는 자연촌이 성장하여 향·소·부곡 등 임내(任內)가 리(里)·촌(村)·동(洞)으로 개편되면서 촌락이 발달하고 확대되는 시기였다. 조선초기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조세를 수취하며 호구를 파악하기 위한 면리를 어떻게 편제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활발하였다.
촌락 편제 논의는 세종대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 논의의 특징은 촌락의 집거 형태 즉, 산촌(散村)·집촌(集村) 등 민호의 분포 상태나 촌락의 지형,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 촌락의 발달 정도 등을 참작하여 다양한 편제 형태가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면리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면리제에 대한 조선초의 다양한 논의는 『경국대전』에 이르러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원리에 의거한 획일적 형태로 법제화되었다. 또한 호적·호패제의 시행이 강조되는 추세와 맞물려 정착되어 갔다[『태종실록』 13년 9월 1일].
[내용]
『경국대전』에서 면리 편제는 ‘오가작통법’에 따르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경외(京外)는 5호를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며, 지방은 5통을 1리로 하여 이정(里正)을 두었고, 각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면리임은 전함품관층(前銜品官層) 같은 유력층이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세종 때의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면리제의 실태는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4개 면이 편제되는 방위면 체제였다. 다만 면과 촌, 촌과 리의 명칭이 혼용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양태는 『경국대전』의 법이 세워졌지만 통주-이정-권농관으로 이어지는 지위 체계가 확립되지 못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었다[『세종실록』 16년 9월 15일].
면리 체계는 조선후기에 들어 확립되었다. 숙종조에 국가 시책으로 추진된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과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은 군현의 하부 구조인 면리 편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서 꾸준히 성장해 온 자연촌 중심의 리(里)를 인정하여 체계적인 면리제가 시행되었다[『숙종실록』 37년 12월 26일]. 즉 5호를 1통으로 하고, 리 단위는 5통에서 10통까지는 소리(小里)로 하고 11통에서 20통까지 중리(中里), 21통에서 30통까지는 대리(大里)로 하여 면리 규모의 다양성이 인정되었다. 또한 ‘통수(統首)-이정(里正)과 유사(有司)-도윤(都尹)과 부윤(副尹)’으로 이어지는 통-리-면의 운영 체계와 지위 체계가 정립되면서 면리제는 새로운 편제를 이루었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변천]
면리는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발달과 인구 증가에 편승하여 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조선초기에는 방위면 체제 즉 동면, 서면, 남면, 북면, 내면 등 5개의 면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중기에는 남면이 남일리면과 남이리면으로, 북면은 북일리면과 북이리면으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후기에는 방위면 체제에서 탈피하여 고유의 명칭을 가지는 면리 체제가 구축되고, 큰 군현의 경우는 약 20개 내외의 면이 정립되었다.
면리의 분화 양상은 자연촌의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회·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 하나의 마을이 확장되면서 큰 마을과 작은 마을 형태로 분화되거나 신촌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형태에서 그 경제적 자립성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면리제로 정착되어 간 것이다. 특히 면리 체제가 수취의 단위가 되는 것도 그 숫자가 늘어나는 동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 행정 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김준형, 「18세기 이정법(里定法)의 전개 : 촌락의 기능 강화와 관련하여」, 『진단학보』58, 1984.
■ 박진우, 「조선 초기 면리제와 촌락 지배의 강화」, 『한국사론』20, 1988.
■ 오영교, 「17세기 향촌 대책과 면리제의 운영」, 『동방학지』85,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