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양인(良人)은 천인과 함께 ‘양천(良賤)’으로 통용되었듯이 천민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혈통상의 지위를 나타내었다. 그렇다고 양인이란 용어가 항상 천인의 상대 개념만으로 쓰인 것은 아니었다. 혈통 하나만을 기준으로 신분을 구분할 수 없었던 당시에 있어서, 양인은 신분 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이지 않았다. 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양인은 국역 부담 대상자 판별을 위한 혈통상의 기준으로 사용된 신분 개념이었다.
[내용 및 특징]
양인은 조선시대 사회 신분 구성체 논의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신분 개념이다. 그런데 양인의 실체를 추적해 보면, 양인은 신분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1458년(세조 4)에 공표된 ‘호패사목(號牌事目)’을 살펴보면 양인은 무음(無蔭)과 공사천(公私賤)·향리(鄕吏)·역자(驛子)·부리서도(府吏胥徒)·민정(民丁)·군사(軍士) 등과 함께 잡목의 백색패(白色牌)를 사용한다고 하였다[『세조실록』 4년 4월 5일]. 그 다음에 병조(兵曹)에서 아뢴 호패의 조건에서도 무음자제(無蔭子弟)와 양인, 모든 전함(前銜), 잡색군사(雜色軍士), 잡직인(雜職人), 부사서도(府史胥徒), 민정, 공사천은 ‘모주(某州) 모면(某面) 모리(某里) 호주(戶主) 모(某) 솔거(率居)’를 쓰게 한다고 하였다[『세조실록』 4년 7월 5일].
전자에서는 무음과 양인부터 군사까지 각 신분과 직역(職役)을 죽 나열하였는데, 후자에 와서 무음이 무음자제로 고쳐지고 양인 다음에 있던 공사천이 마지막 부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던 군사를 앞으로 옮겨와 양인 다음에 모든 전함과 잡색군사를 넣었다. 이를 통해 볼 때에는 양인이 마치 직역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양인은 무음부터 공사천까지 나란히 기록됨으로써, 직역자 외에 역(役)이 없는 사람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 여기에 공사천이 포함된 것은 혈통상의 양천 변별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국역 부담에서 예외인 천인 외의 피지배 계층을 모두 양인이라 칭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양인이 천인과 나란히 기록되지 않은 다른 사례를 보더라도 위와 같은 해석을 적용할 수 있다. 1439년(세종 21) 7월에 병조(兵曹)에서 비변사(備邊司)의 계책을 올린 내용 가운데, 선군(船軍)의 선발과 포상, 잡색군(雜色軍)의 모집 등에 관하여 논하면서 양인을 염간(鹽干)·색리(色吏)·잡색군(雜色軍) 등과 함께 거론하였다[『세종실록』 21년 7월 20일]. 이 사례도 결국 선군에 소속된 염간과 양인의 구별이 양천의 혼효(混淆) 상태에 있었던 염간의 신분적 지위로 말미암아 양천의 변별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양인을 동시에 거론한 것이다. 또한 잡색군 내에 관노(官奴)와 공사천구(公私賤口)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양천 분별을 위한 목적에서 양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따름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따라서 양인의 용례는 거의 대부분 양천 분별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는 국가의 명분론적 사회 신분 질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규정이었다. 호적을 작성한다든가, 호패 제도를 실시하는 목적 중의 하나도 양천의 분변이었다[『태종실록』 7년 11월 2일]. 국가에서 요구하는 인적 자원은 양인이었기 때문에 합목적성(合目的性)에 부합하도록 양인에게는 각종의 권리가 부여되었다. 천인을 양인으로 속량(贖良)하고 면천(免賤)한 후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양천의 구분은 국가에서 요구하는 인적 자원을 파악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나 각종 고문서, 호적 등에서 ‘양인 아무개’ 하는 식으로 쓰인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때의 양인은 정해진 직역이 없는 평민으로서 자신의 혈통상의 지위를 나타내는 용어일 뿐이다. 즉 양인으로서의 유역자(有役者)는 이미 양인임이 판정되었으므로 직역 기재상의 문제가 없으나, 무역자는 국가의 공민(公民) 편제의 기준을 혈통상의 양천 판별에 우선을 두었으므로 평민이라 쓰지 않고 양인이라 썼던 것이다. 따라서 양과 천은 국가에 의한 제도상의 지위 구분을 위해 쓰인 용어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송준호, 『조선 사회사 연구: 조선 사회의 구조와 성격 및 그 변천에 관한 연구』, 일조각, 1987.
■ 유승원, 『조선 초기 신분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7.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임민혁, 『조선의 예치(禮治)와 왕권』, 민속원, 2012.
■ 이태진, 「조선시대의 양반」, 『학예지』3,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