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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상민(常民)은 조선시대에 서인(庶人) 계층을 부르는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상(常)’은 ‘평상(平常)’의 뜻으로, 상민은 평상지민(平常之民)의 준말이다. 보통 평민 계층의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며, 서인·상인(常人)·평인(平人)·평민(平民)·양민(良民) 등과 유사한 개념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 용례가 드물고, 『경국대전』에는 아예 관련 기록조차 없다. 따라서 상민은 하나의 신분 개념을 나타내는 법제적 용어로 쓰이지 않은 보통명사라고 하겠다.
[내용 및 특징]
상민은 평민과 유사한 용어인데, 양자가 바뀌어 쓰인 사례가 있다. 1455년(단종 3) 정월에 도적 퇴치의 방법으로 정해진 제도 가운데 하나가, 유품(流品)과 공음(功蔭)이 있는 자제(子弟) 외에 평민 5호(戶)로 1통(統)을 만들어서 그 통 안에 도적을 용납하여 숨겨 준 자가 있으면 강도·절도를 막론하고 통호(統戶)를 아울러 전 가족을 변방에 옮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단종실록』 3년 1월 19일]. 그런데 같은 해 3월의 같은 사안의 계사(啓事)에서는 평민을 상민으로 고쳐서 사용하였다. 이 제도는 1455년(세조 1) 5월 30일의 수교로 확정되었는데, 이를 다시 언급한 형조(刑曹)의 계사에서도 작통(作統)의 대상을 상민이라 칭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4일]. 여기에서 상민은 유품 및 공음 자제와 대비되는 신분이며, 양반이 아니라 평민 계층에 속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민은 흔하게 쓰인 용어가 아니고 법적으로 개념 지을 수 있는 용어도 아니었다. 이에 반해 평민은 국역(國役)에 종사하고 있지 않거나 농사를 제외한 일정한 직역(職役)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를 가리켰다. 구실이 없는 무역자(無役者)로서 각종 국역 차정(差定)의 기준이 되는 법제적 신분이 평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민은 그런 개념으로 쓰인 예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평민을 상민으로 고친 것이다. 상민은 법제적 신분이 아니었으며, 유역자(有役者)와 무역자를 아울러서 순수한 서인 계층을 범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상민이 양반과 대비되는 사실은 1626년(인조 4)에 군적법(軍籍法)을 논한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의 군적법에서는 가장 시행하기 어렵게 여긴 것이 사족(士族)을 군보(軍保)로 강정(降定)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대부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군보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아 모두 정속(定屬)되었는데, 그 법이 오랫동안 폐지되어 천한 이름이 되자 사족이 강등되어 군보가 되는 것을 보고 상민이 사족을 자신들과 같은 무리로 보아 가벼이 업신여긴다고 하였다[『인조실록』 4년 8월 4일]. 여기에서 상민은 사족 혹은 사대부와 대비되는 하위의 신분이었다. 낙강(落講)한 유생들이 차정(差定)되는 군보는 상민이 자신들과 같은 신분으로 여긴다고 하였으니, 상민은 곧 군보로 전환될 수 있는 신분을 의미하였다. 다시 말하면, 상민은 군역(軍役)을 부담할 의무가 있는 서인에 속한 신분이라는 것이다.
서인 신분에 속한 상민은 상업에 종사할 수도 있었다. 1630년(인조 8)에 개성부의 한천경(韓天景)이란 사람이 그의 여종을 의빈부(儀賓府)에 빼앗겼다고 하여 정소(呈訴)한 일이 있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은 이 사건에 대해 지방의 상민으로서 감히 상사(上司)와 소송을 벌였다고 하면서, 의빈부에서는 "한천경이 송도의 부상(富商)으로 송사하기를 좋아하였다."고 보고하였다[『인조실록』 8년 6월 6일]. 한천경은 송도의 부유한 상인이지만 상민에 속한 신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상민은 직역(職役)이 아니며 서인 신분의 불특정 직역군을 포괄하는 계층의 의미가 강함을 알 수 있다.
상민은 이러한 신분 혹은 계층의 의미를 갖고 있는 한편으로, 평선(平善)의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추조(秋曹: 형조)에 적체된 죄수’와 상민을 대립 관계로 파악하여 언급하거나[『영조실록』 8년 12월 18일], 무신년에 위협에 못 이겨 따랐던 무리를 상민으로 대하며 교화하라고 하였듯이[『영조실록』 13년 12월 1일], 죄수와 비교된 상민은 죄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상민은 혈통상 양인의 신분에 속한 보통의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칭호였다. 그들은 군역을 부담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상업에도 종사할 수 있는 평범한 자유민으로서 사대부의 하위에 위치하는 피지배 계층의 집단 범주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 임민혁, 『조선의 예치(禮治)와 왕권』, 민속원, 2012.
■ 김필동, 「신분이론 구성을 위한 예비적 고찰」, 『사회계층 : 이론과 실제』, 다산출판사, 1991.
■ 이성무, 「조선 초기 신분사 연구의 재검토」, 『역사학보』102,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