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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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中人)

서지사항
항목명중인(中人)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의역중인(醫譯中人), 기술관(技術官), 잡업인(雜業人)
분야사회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양반에는 미치지 못하나 양인보다는 우위에 섰던 중간 신분층.

[개설]
조선시대 중인(中人)은 역관, 의관, 음양관, 율관 등의 기술관과 서얼, 서리(胥吏), 향리 등을 말한다. 국가의 각종 행정 실무와 실용 기술을 담당했던 실제 운영자들이었다. 이들은 전문적인 행정 실무와 실용 기술을 통하여 양반 못지않은 지식과 경제력을 소유하기도 하였으나 양반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았다.

[내용 및 특징]
중인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常人)도 아닌 중간층을 말한다[『정조실록』 15년 11월 11일]. 조선시대 중인은 서울 중심가에 살던 역관, 의관, 음양관, 율관, 산원(算員), 화원(畵員), 악원(樂員) 등 기술관을 총칭하는 협의의 중인과 중앙의 서리(胥吏), 지방의 향리(鄕吏), 군교(軍校) 등을 포함하는 광의의 중인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전기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 ‘중인’이란 용어는 신분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주로 중등 정도의 재산이나[『태조실록』 총서 35번째기사] 중등 정도의 품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태종실록』 3년 9월 11일] 사용되고 있다. 중간 신분층으로서의 중인 개념은 조선후기에 널리 쓰였다.

그러나 중간 신분의 의미를 가지는 중인 개념을 조선초기까지 소급해 사용해도 된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15세기 자료에서 기술관·서리·향리·서얼을 중인으로 칭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중인 신분은 명종·선조 이후 사림 정권이 확립되고 사족이 배타적 신분을 형성하게 되는 16세기 이후에야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상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중인층이라는 개념이 16세기부터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다만 15세기를 중인층 확립의 과도기로 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중인이란 서울의 중심가에 거주한 데서 그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비변사등록』의 영조조에 의하면, 조종(祖宗)의 제도에 중인 및 소민(小民)에게 서울의 조시(朝市) 근처에 머물러 살게 하여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게 한 데서 중로(中路), 즉 중인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조시 근처란 청계천의 육교(六橋: 청계천 광교의 별칭) 부근으로, 조선초 이래로 의관, 역관, 화원 등의 기술직 종사자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기술관들의 집중적인 거주지가 된 지역이다.


##그림1_00015070_오늘날 청계천

15세기 후반부터 사회를 재편성하는 가운데 양반층은 행정 실무자인 경아전 및 서얼과 함께 기술관을 하급 지배 신분으로 격하시켰다. 이후 기술관은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지배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술관들은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차별을 받았다. 기술직은 모두 체아직으로 되어 있어 체아록(遞兒祿)만 받을 수 있었으며, 과전법이 직전법으로 바뀐 뒤에는 직전(職田)이 지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에 공로가 있는 역관이나 의관이 당상관에 제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규정상 기술관은 정3품 당하관직을 상한으로 한품서용(限品敍用)되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여 전문 기술이나 기능 교육을 지배층이 배워야 할 덕목으로 보지 않았다. 기술직을 잡류로 대우하고 자신들의 반열에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일정한 사회적인 차별 대우는 그들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여 중인들은 사회적으로 독특한 계층을 형성하였다. 중인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동류의식, 그들 사이의 통혼을 통한 신분적 유대의 강화, 경제적인 여유, 그리고 그것을 대물림하는 세전성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래서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신분의 동요와 해체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지만, 중인의 경우 세전과 통혼을 통해 오히려 사회적 유동성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행정 실무에 종사했던 전문직 중인은 언행이 세련되고 생활이 깔끔하며 대인 관계에 밝았다. 생활양식뿐 아니라 그들이 쓰는 문서 양식도 따로 있었으며 시문까지도 독특하였다. 중인 문화라고 할 만한 생활 규범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중인들, 특히 서울 지역의 기술관과 아전들은 조선후기에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시를 짓고 즐기기 위한 모임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위항문학(委巷文學) 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며, 이를 통하여 지적 성장과 결집력을 과시하였다.

##그림2_00015070_조선 후기 화원인 이인문(李寅文)의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

[변천]
조선후기 중인들은 자신들의 신분 의식을 자각하게 되었다. 위항문학으로 불리는 적극적인 시사(詩社) 활동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중인은 자신들을 얽매는 구체제에 대한 반발로 강렬한 개혁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들 중에는 경세가로서의 포부를 실천한 사람도 있었다.

19세기 들어 중인들은 자신들의 신분의 연원을 밝히는 『규사(葵史)』, 『연조귀감(掾曹龜鑑)』, 『호산외기(壺山外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집단 신분 상승 운동으로 중인 통청(通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을 주재했던 관상감·사역원·전의감·혜민서·율학 등의 유사(有司)들은 대부분 잡과 시험에 합격한 잡과 중인들이었다. 당시 중인층 의식의 강화와 신분 상승 운동 등이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중인이 담당하던 업무는 양반 중심의 사회에서는 이차적인 것에 불과했으나 근대 사회에서는 일차적으로 필요한 지식이었다. 따라서 근대화 과정에서 중인층의 역할은 어느 신분층보다도 뚜렷하였다. 중인은 양반 문화에 대한 집착이 적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습득한 지식이 새로운 체제에 적용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지난날의 신분 제도와 양반 문화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만큼 의식 또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들이 갖추고 있는 지식도 새로운 시대와 문물에 친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전환기를 맞아 중인들은 서구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 근대 이행기 중인 연구』, 신서원, 1999.
■ 이남희, 『조선 후기 잡과 중인 연구: 잡과 입격자와 그들의 가계 분석』, 이회문화사, 1999.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한영우, 『조선 전기 사회 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 [집필자] 이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