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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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醫官)

서지사항
항목명의관(醫官)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의원(醫員)
관련어의과(醫科), 전의감(典醫監), 내의원(內醫院), 혜민서(惠民署), 활인서(活人署)
분야사회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의료·의약 등에 관한 일을 전담하여 보았던 잡직 관원.

[개설]
의관(醫官)은 국가의 의료 사업을 담당하였으며, 의료 관청에 따라 진료 받는 사람들의 신분이 각각 달랐다.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왕실의 진료나 약 제조를 담당했으며 때로 왕명에 따라 대신들의 의료에도 종사하였다. 전의감(典醫監)에서는 왕실 및 조정의 신하들의 의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이나 병졸들의 의료도 담당했으며, 혜민서(惠民署)에서는 주로 일반 서민들의 의료 활동을 맡았다. 활인서(活人署)에서는 도성 안의 전염병 환자와 빈민 및 죄수들의 진료 활동에 종사하였다. 지방의 의료는 의학생도가 파견되어 맡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의학 교육은 중앙의 경우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에서, 그리고 지방의 경우 지방 관서에서 실시하였다. 전의감 50명, 혜민서 30명을 두었으며, 지방에서는 부에 16명, 대도호부와 목에 각 14명, 도호부에 12명, 군에 10명, 현에 8명씩 의학생도를 두었다. 의학 교육은 의학교수와 훈도가 담당하였다.

의관이 되는 길에는 두 갈래, 취재(取才)와 의과 시험이 있었다. 취재는 말 그대로 실무 능력을 시험하는 것으로, 취재에 합격하면 임시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국가가 인정하는 의관이 되기 위해서는 자격시험이라 할 수 있는 의과에 합격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종6품 주부(主簿) 이상의 고위 의료 관직은 의과 합격자만 임명될 수 있었다.

의과는 양반들이 응시했던 문과와는 달리 대과·소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로서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에만 설행되었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 있는 해에 시행되는 정기 시험이며, 증광시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실시되었던 부정기 시험을 말한다. 의과는 초시(初試)복시(覆試) 두 단계만 있고 왕 앞에서 시험 치는 전시(殿試)는 없었다.

선발 인원은 초시에서 18명, 최종 시험인 복시에서 9명을 뽑았다. 그런데 법 규정대로 9명을 선발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19세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정원에 미치지 못하게 뽑았다. 이는 의학의 특성상 정원대로 반드시 뽑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술이 우수한 자들을 뽑았기 때문이다.

의과에 합격하면 백패(白牌)를 수여한 뒤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계를 수여하였다. 이미 품계를 가진 자에게는 그 품계에서 1계를 더 올려 주고, 올린 품계가 응당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경우에는 1계를 또 올려 주었다. 참고로 양반들이 응시하던 문과의 경우 1등 합격자에게는 정7품직을 수여하였으며, 원래 관품을 가지고 있던 자에게는 4계를 더 올려 주었다.

의관들은 기본적으로 한품거관법(限品去官法)에 의해 관로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적인 승진이 보장되지 않았다. 법규상으로는 최고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들은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상관에 오른 예도 존재한다.

실제로 의원들에게는 직능에 따라 당상관으로 승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졌다. 우선 의관은 왕의 최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왕이나 왕실 구성원의 병을 낫게 했을 경우 특별히 승진시켜 주는 예가 빈번하였던 것이다.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許浚)의 경우, 선조의 어의(御醫)로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으며[『선조실록』 37년 6월 25일], 1606년에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에 올랐다[『광해군일기』 7년 11월 13일].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예로부터 왕의 병을 고친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숭자중질(崇資重秩)이 이와 같이 심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허준의 가자(加資) 개정을 주장하였다. 의관들의 제도에 벗어나는 고품계화는 사실 빈번하게 조정의 논란을 불러왔다[『현종실록』 3년 10월 7일].

따라서 의관들의 실질적 관직은 참상관직(6품에서 종3품)에 집중되어 있었다. 의과 합격자의 약 70%는 참상관까지 승급했으며, 당상관직(정3품에서 정1품)으로 진출한 경우도 15% 가량 있었다. 그런데 그들 15%조차도 대부분 동반직이 아니라 서반직인 중추부(中樞府) 당상관직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중추부는 서반 정1품아문 문무당상관으로 맡은 직임이 없는 자를 우대하는 의미로 임명하는 예우 관서였다. 일종의 명예로 중추부 당상관직을 제수했으며, 그것도 단기적으로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의관에게는 동반 당상관직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의관들에게 급료가 지급되지 않는 명예직 품계에서는 당상관까지 승급하도록 허용한 반면, 관직이라는 실직(實職)에는 제한을 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관은 때로 지방의 수령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다른 역관, 음양관, 율관의 상급 기술관도 지방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의원이 제일 많았다. 그래서 『숙종실록』을 보면, 숙종 연간에는 경기도 수령 자리는 의관들이 으레 맡는 자리가 될 정도였다고 하였다[『숙종실록』 11년 7월 14일]. 하지만 본인이 지방관으로 진출했다 하더라도, 그 자손들은 다시 기술직에 종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방관으로 진출했다고 해서 양반층으로 신분 상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손 대에서는 다시 기술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의관은 오늘날 대표적인 전문 직종으로 꼽히는 의사들이지만, 조선시대가 그들에게 부여했던 사회적 지위와 위상은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목숨을 다룬다는 직무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신분적으로는 중인층에 속하였다. 의학 전공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그들은 독특한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였는데, 일정한 사회적인 차별이 그들 사이의 결속을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독자적인 하나의 계층으로서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러한 유대감은 19세기에 활발하게 편찬된 중인 족보, 특히 『의과팔세보(醫科八世譜)』, 『의팔세보(醫八世譜)』,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동류의식, 그들 사이의 혼인을 통한 신분적 유대의 강화, 그리고 의료직 등 기술직을 대물림하는 세전성(世傳性)이 의관들의 세계를 특징짓고 있다. 그들의 세전성은 "의원이 3대가 되지 않으면 그 약을 먹지 말라."는 『조선왕조실록』의 정형화된 문구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손홍렬, 『한국 중세의 의료 제도 연구』, 수서원, 1988.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 근대 이행기 중인 연구』, 신서원, 1999.
■ 이남희, 『조선 후기 잡과 중인 연구: 잡과 입격자와 그들의 가계 분석』, 이회문화사, 1999.
■ 이남희, 「의사, 중인으로 살아가기」, 『조선 사회 이렇게 본다』, 지식산업사, 2009.

■ [집필자] 이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