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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사초와 각 관청에서 보내온 중요 문서를 날짜별로 정리하여 춘추관에 보관하던 문서.
[개설]
조선후기 「실록청찬수범례」의 제1조를 보면, 실록 수찬의 기초 자료로 사관(史官)의 시정기(時政記), 주서(注書)가 정리한 『승정원일기』, 내외 겸춘추관관원(兼春秋館官員)의 기록, 비변사가 보관한 장계축(狀啓軸), 의금부의 추안(推案), 형조의 긴관(緊關) 문서를 거론하고 있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정기는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핵심 자료였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시대에 시정기 편찬이 처음 언급된 것은 1432년(세종 14)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가 "구양수(歐陽脩)의 논의에 따라, 현재 조선의 예악형정(禮樂刑政)과 그에 대한 찬반 논의를 춘추관에서 일정에 따라 수찬하여 시정기라고 부르자."고 한 건의에서였다. 또 기밀이나 인물의 능력과 인격에 대한 기록은 성법(成法)대로 사관이 관리·보관하게 하여 훗날 『조선왕조실록』 편찬 때를 대비하면 국사(國史)가 소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정인지는 예악형정에 대한 논의는 시정기로 편찬하고, 인물에 대한 포폄을 기록한 사초(史草)는 뒷날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하게 하자는 의견을 낸 것이었다[『세종실록』 14년 11월 27일]. 정인지의 말에 따르면 사관의 사초와 각 관청에서 보내오는 중요 문서가 시정기였고, 가장사초(家藏史草)는 시정기에서 제외되는 것이었다.
[구성/내용]
1434년에는 당상관 1명이 매월 한번 춘추관에 나가 사관들이 시정기를 제대로 수찬하는지 점검하게 하였다. 정3품 당하관인 예문관 직제학(直提學)과 정4품인 직관(直館)의 두 관직은 따로 직사가 없으니, 이 관직에 깨끗하고 곧으며 문장을 잘하는 사람을 제수하고 사관을 겸하게 하여, 매일 춘추관에 나와 모든 대소 아문의 공보문서(公報文書)를 점검하게 하고, 또 이들로 하여금 연월에 따라 정리하여 그때그때 편찬·기록하게 했던 것이다. 이때도 시정기는 현재 행해지는 일만 기록할 뿐이어서 사관은 시사(時事)를 기록하는 것이 직분이기는 하지만, 그의 견문이 미치는 데까지 인물의 현부(賢否)와 득실(得失) 및 기밀(機密) 등도 상세히 직서(直書)하여 보관하다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가 되면 제출하게 하였다. 시정기 한 부는 포쇄(曝曬)할 해가 되면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런 규례를 기초로 시정기 편찬은 『경국대전』 「예전」 에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각 아문의 중요한 문서를 모아 책을 만들어 매년 말 책 수를 보고한다."고 규정되었다.
그런데 종종대에 시정기 편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이는 시정기 편찬이 갖는 성격을 이해하면 해석이 가능한 문제이다. 시정기를 엄격한 ‘편찬(編纂)’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1434년 춘추관의 광기사(廣記事) 조항이나 『경국대전』에서는 ‘편찬과 인쇄’를 전제로 하였지만, 시정기는 가장사초가 아닌 공적 문서였으므로 정리 또는 등록만 잘하고 있다면 굳이 편찬하거나 인쇄할 이유가 없었다. 시정기는 정리와 관리 대상이었지 편찬이 필요한 기록은 아니었다. 굳이 말한다면 시정기는 임시 파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에 시정기 편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전임사관인 예문관 봉교(奉敎: 정7품 2인)·대교(待敎: 정8품 2인)·검열(檢閱: 정9품 2인)이 늘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476년(성종 7) 시정기 편찬 논의를 재개하면서도 시정기 편찬의 주체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책임자만 언급되었던 것은 그것이 사관인 한림의 일상 업무였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한 사람들을 시정기에서 조사하여 제거하였고, 자신의 잘못이 후세에 전해질까 두려워 시정기를 삭제하고 불태웠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해를 입을까 두려워 사관에게 부탁하여 자신들의 상소문이나 계사(啓事)를 없애 버렸다[『연산군일기』 6년 5월 5일]. 여기서도 ‘시정기’는 신료들이 올린 계사나 상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조선초기 시정기 편찬을 둘러싼 논의는, 예문관 참외관이 전임사관이 되고 이들과 겸춘추가 작성하는 일차적인 사료인 사초의 엄정한 관리 원칙이 확립되면서, 사관이 춘추관에 보관하는 사초 및 각 관청에서 받은 문서, 상소문 같은 공문을 수집·정리하는 임무가 시정기의 편찬으로 불리었다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정기의 관리도 자연스럽게 전임사관인 한림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겸임사관을 통하여 각 관청 문서의 확보가 용이해지고, 『승정원일기』나 『경연일기』 등이 꾸준히 작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정기는 편찬의 필요성보다 정리의 필요성이 컸고, 그 일은 춘추관 겸임관, 즉 예문관 참외관인 전임사관의 몫이었다. 여기에는 예문관 참외관을 중심으로 사관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기록 주체와 편찬 주체의 이원성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역사 왜곡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조선초기 나름의 사관 제도 운영 방향이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