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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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련대(扈輦隊)

서지사항
항목명호련대(扈輦隊)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병조(兵曹), 정련배(正輦陪), 부련배(副輦陪), 옥교배(玉轎陪), 양산선차비(陽繖扇差備), 등롱군(燈籠軍), 의장군(儀仗軍), 궁내부(宮內府)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에 왕이 행차할 때 타는 연(輦)을 호위하던 군인.

[개설]
호련대는 1676년(숙종 2) 창설되어 주로 병조(兵曹)에 소속되었고, 서울 사람들 중에서 군인을 선발하여 왕이 거둥할 때 타는 연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호련대는 정련배(正輦陪)·부련배(副輦陪)·옥교배(玉轎陪)·양산선차비(陽繖扇差備)·등롱군(燈籠軍)·의장군(儀仗軍)을 모두 일컫는 명칭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련배·부련배만을 호련대라고 하거나 전체에서 의장군만 빼고 호련대라고 하는 등 다양하게 정의하였다.

호련대의 정원은 『만기요람』에 의하면 360명이었고, 1년에 무명 6필과 보(保) 3명을 제공받았다. 왕의 연을 호위한 호련대에게는 죽 등의 음식을 주고, 목면(木綿) 등을 상으로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다.

1830년(순조 30)에는 호련대 가운데 무뢰배(無賴輩)와 한잡인(閑雜人)을 제거한 다음 내력이나 주소지가 확실하고 호적이 분명한 자들로 보충하였는데, 이들을 별안군(別案軍)으로 불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병조가 폐지되고 군무아문(軍務衙門)이 설치되었다가 군무아문의 명칭이 군부(軍部)로 바뀌면서 호련대의 소속처가 변화하였다. 이어 1895년 윤5월 호련대는 군부에서 궁내부(宮內府)로 이속되었다가 1907년(순종 즉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호련대 군인은 해당 패두(牌頭)가 건장한 자를 선발하면, 낭청(郎廳)에서 과거 3차례 식년(式年)의 호적을 심사한 후 사복시 관원이 다시 자세히 살펴본 후 호련대로 편성시켰다.

호련대의 수는 ‘1714년 367명, 1782년 400여 명, 1894년 471명’ 등으로 다양하였다. 순조대 『만기요람』에는 호련대 360명이 기재되었는데, 그중에서 ‘정련배 60명은 어가가 거둥할 때, 부련배 40명은 어가가 궐 밖으로 나가는 동가(動駕)·나라에 경사가 있어 왕에게 나아가 축하하는 진하(陳賀)·왕이 정전의 옥좌에 나와 앉는 전좌(殿座) 때, 옥교배 30명과 등롱군 40명은 동가·전좌 때’ 왕을 호위하였다. 양산선차비 20명과 의장군 170명은 동가·전좌 때 줄지어 죽 늘어서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1679년(숙종 5)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왕이 행차하였을 때 호련대 159명이, 1680년 칙사를 맞을 때에는 호련대 227명이, 1761년(영조 37) 명릉(明陵)[『영조실록』 37년 8월 13일]·1772년 대보단·1781년 육상궁·1789년 현륭원(顯隆園)에 거둥하였을 때[『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에도 호련대가 연을 호위하였다.

아울러 호련대는 1857년 순원왕후·1890년 신정왕후 등의 국장(國葬)과 관련하여 정일(正日) 때 신련(神輦)을 메었고, 1698년(숙종 24) 강 연안의 산 밑에 사는 주민들이 전염병으로 죽고 흩어져 민호가 줄어든 것을 계기로 내빙고(內氷庫)에 얼음을 저장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변천]
호련대는 1676년(숙종 2) 서울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여 창설되었다. 호련대의 정원은 1699년 367명, 순조대 『만기요람』에 의하면 360명, 1894년 471명 등으로 변화가 있었다. 1714년의 경우 호련대 1명에 보인(保人) 3명을 주고 여정(餘丁) 1,788명은 병조에 소속시킨 후 매년 군포 2필을 거두도록 하였다.

1830년 병조 판서 서준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련대 가운데 무뢰배와 한잡인을 제거하고, 대신 내력이나 주소지가 확실하고 호적이 분명한 자들로 보충한 다음 명칭을 별안군이라고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병조가 폐지되고 군무아문이 설치되고, 1895년 3월 군무아문이 군부로 명칭이 바뀌면서 병조 소속이었던 호련대의 소속처도 변화하였다. 같은 해 윤5월 호련대는 궁내부로 이속되었다가 1907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의 1907년 12월 7일 기사에서 ‘호련대 폐지에 대한 원망이 커서 이달까지만 더 유지한 후 영원히 폐지한다고 하더라.’ 하는 것에서 1908년에 폐지되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순원왕후국장도감의궤(純元王后國葬都監儀軌)』
■ 『신정왕후국장도감의궤(神貞王后國葬都監儀軌)』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 제도』, 혜안, 2000.
■ 신명호, 「조선 후기 국왕 행행 시 국정 운영 체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집필자] 서태원